2024. 5. 12. 15:40ㆍ다음 역, 에덴/사냥매 (카이로스)
카이로스의 바이크가 그린 아일랜드를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어느새 이 속도에 나 역시 익숙해진 듯 했다. 그린 아일랜드로 향하는 길, 나는 카이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나]
카이로스, 도와줘서 고마워요.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전투를 계속 살펴보고 있었잖아요.
난 카이로스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털어놨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바이크의 속도를 더욱 높일 뿐이었다.
[나]
카이로스?!
갑자기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카이로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카이로스가 갑자기 속도를 높인 이유를 궁금해하던 중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로스]
바람이 아직도 약한가봐?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내 입을 바람으로 막을 생각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입 다물어 주는 수밖에.
-
다리에 도착하고서야 카이로스는 속도를 낮췄다.
[카이로스]
거의 다왔군.
[나]
그렇네요.
[카이로스]
네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나]
알겠어요.
[카이로스]
하지만 넌... 확실히 이상해. 이 세계의 사람 같지 않아. 넌 강한 힘을 지났지. 적의 지휘관이 누군지 재빠르게 파악하고 공격할만큼 전략도 좋아. 경험이 전무한 게 아니었어. 하지만... 넌 최후의 일격만 노리느라 오히려 쉽게 방심하더군.
...역시 그는 예리했다. 전투 경험은 에르세르 대륙에서 쌓았다. 주변의 위험에 둔감한 건, 시시각각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에 온 적이 없기 때문일 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카이로스가 바이크에서 내렸다.
[카이로스]
너의 비밀을 알아내기도 전에 네가 사라지는 건 원지 않아. 그러니 널 도울 생각이야.
어느새 바이크는 그린 아일랜드에 도작해 있었다.
-
오늘의 그린 아일랜드는 평소보다 더 북적였다. 방랑자가 날마다 늘어나는 탓에 에덴의 능력자들도 애를 먹나 보다.
[카이로스]
하루새 더 엉망이 됐군. 어서 물을 뜨도록. 여긴 안전하지 않으니까.
배낭 안에서 물주머니를 꺼냈다.
[카이로스]
어제보다 두 배는 는 것 같은데?
[나]
다들 상처가 더 심해졌거든요...
[카이로스]
오늘은 내 바이크도 있으니 고생해서 물주머니를 나르지 않아도 될 거고.
이번에도 신세를 지려 한다는 걸 이렇게나 빨리 눈치채다니...
[나]
고맙게 생각하긴 하는데, 그렇게 생색낼 것까진 없...
[카이로스]
됐으니까 빨리 끝내. 널 데려다주고 나서 눈 좀 붙일 생각이니, 서둘러.
카이로스의 재촉에 나는 혀를 낼름 내보이고는 쪼그리고 앉아 물을 담기 시작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고개들 돌려보니 카이로스가 내곁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샘물을 담고 있었다. 에린의 말이 맞다. 카이로스는 겉은 차가워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다.
그 순간, 물을 담던 카이로스가 뛰어놀던 물고기에게 물세례를 받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세인트셀터 학원의 그 카이로스 선배는 가는 곳마다 귀여운 동물들이 따라다니곤 했는데...
[나]
동물들이 카이로스를 무척 따르는 것 같아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 카이로스가 눈을 내리깐 채 차갑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카이로스]
동물들로 모자라 모래 괴물까지 날 따르더군...
[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카이로스]
'블랙 사크' 엘리사가 왜 날 제자로 삼았는지 알아? 그 전설의 용병은 언제나 단독으로 움직였어. 내 주위로 모래 괴물이 모인다는 걸 알았거든. 날 미끼 삼아 모래 괴물을 끌어들이겠다며 제자로 삼은 거야.
담담하게 말을 잇는 카이로스를 보며 순간 숨이 멎는듯했다. 고요한 샘물을 차분히 바라보는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나]
그런 건... 다 지나간 일이에요. 계속 물이나 길어요. 아니다, 우리 물고기 잡을래요?
[카이로스]
위로할 필요 없어, 상관없는 일이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로스를 쳐다봤다.
[나]
상관없다면서 왜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는 건데요?
[카이로스]
네가 먼저 얘길 꺼냈잖아.
무거운 표정의 눈빛을 마주하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동물들이 잘 따른다'라는 내 말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어쩌면 언제나 혼자 다니는 것도 냉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습관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미안해요, 몰랐어요. 절 구해주고 많이 도와줬는데... 일부러 가슴 아픈 이야기를 물어보려 한 건 아니에요.
[나]
카이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딱히 가슴 아픈 이야기는 아니야. 함께 싸우고 서로의 약점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이라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담담한 그의 말에 어젯밤의 전투가 떠올랐다.
[나]
그러니까, 함께 싸울 수 있을 만큼 절 신뢰한다는 뜻인가요? 영광이네요. 보통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불러요. 지난번에 절 여러 번 도와줬었죠,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저도 앞으로 도와줄게요.
말을 한바탕 쏟아낸 뒤에 한숨을 돌렸다. 그런 뒤에 고개를 들곤 카이로스의 눈을 쳐다봤다. 무표정하게 담담히 나를 바라보던 카이로스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바닥에 필쳐놓은 물주머니를 가리켰다.
[카이로스]
꾸물거리다간 안전 시간을 넘겨서도 끝내지 못할 거야.
아, 맞다! 카이로스랑 이야기하느라 오늘 할 일을 깜빡할 뻔했다! 난 자리에서 필쩍 뛰며 잽싸게 돌아가 물을 담았다. 카이로스도 제자리로 돌아와 함께 물을 담아줬다.
카이로스가 고개를 숙일 때...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웃지?
[나]
재미 있는 거라도 있어요?
[카이로스]
아니, 그냥 즐거운 기분이 들어서.
[나]
오늘 딱히 즐거운 일도 없었는데...
[카이로스]
맞아. 나도 왜 그런지 몰라.
그의 말에 우린 또다시 침묵에 빠졌다. 난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물주머니를 채우기 시작했다.
[카이로스]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가.
[나]
언제나 혼자였던 사냥매가 절 친구로 받아줬다는 건, 더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
[카이로스]
맞아, 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라. 그게 싫지 않군. 너와 이야기하면 기분도, 일의 효율도 좋아져.
카이로스가 고개를 들곤 물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벌써 다 끝냈다고...?
[나]
아아, 이럴 때가 아냐! 나도 빨리 끝내야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주머니를 채우는 데 집중했다. 카이로스의 도움으로 금새 물주머니를 한가득 채울 수 있었다. 묵직해진 배낭을 메고 카이로스의 바이크에 올라타, 돌아갈 준비를 했다.
-
나를 태운 카이로스의 바이크는 블랙 스트릿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리를 지날 무렵,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카이로스에게 잠깐 멈춰달라고 했다. 그런 뒤 그를 다리 위의 캔버스로 끌고 갔다.
[나]
카이로스, 여기에 캔버스 있는 거 알아요?
[카이로스]
장식품이겠지. 용도는 모르겠지만.
[나]
그건 말이죠... 이제 곧 알게 될 거예요!
난 캔버스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셀터 섬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인트셀터 학원의 캠퍼스 풍경과... 내가 즐겨 가던 학교 카페를 그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놀란 표정의 카이로스가 보였다. 그런 카이로스를 향해 난 환하게 웃었다.
[나]
카이로스, 방금 절 '친구'로 인정한다고 했죠? 친구라면 솔직하게 서로의 과거와 약점을 털어놔도 좋다고 생각해요.
카이로스를 믿기로 결심한 이상 더는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나]
전 또 다른 세상에서 왔어요. 여기 그린 게... 제가 사는 세상이에요. 카이로스의 직감은 정확했어요. 맞아요, 전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제 바람은... 제가 사는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거예요.
나와 카이로스는 다리 한쪽에서 섰다. 관리하지 않아 기울어진 캔버스를 보며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
제가 다니는 학교는 섬에 있어요. 주변의 바다는 그린 아일랜드보다 넓고 광활해요. 제 진구들은 용병 차림이 아니라 편안한 옷을 입고 공부하며 지내요. 전투 같은 건 없죠. 쉴 때는 카페에서 라떼를 마시기도 해요. 카페 직원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고른 커피 원두와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만들고, 손님들은 모두 그 커피를 좋아하죠.
내 눈을 바라보는 카이로스는 다소 놀란 듯 보였지만,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말에 카이로스가 가법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
모래 괴물이 없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다른 데 시간을 할에할 수도 있겠군. 꽤 부러운걸.
그런 카이로스를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모래 괴물이 없는 세상'이 그가 아는 '평화'의 전부라니...
[나]
맞아요. 전 제가 사는 세상을 사랑해요. 여기에 온 건... 그 세상이 무너질까 걱정됐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의 먼 과거는... 제가 살던 세상과 비슷했을 것 같아요. '에덴'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건물, 길거리, 쉴수있는 정원... 이곳이 사막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모두들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능력자가 에덴에 들어와서 살아가려고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 누가 매일 같이 모래 괴물과 싸우는 데 시간을 들이고 싶어 하겠어요...
[카이로스]
하지만 에덴은 밖깥보다 더 위험해. 여긴 거짓된 '평화의 땅'이야. 안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위선은 사라지고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로 바뀌지. 바깥에서 능력자들은 각각의 영역을 정하고서, 그 범위를 벗어나 방해하지 않겠다는 암묵의 약속을 지켜. 그러나 여긴... 약육강식의 논리로 굴러가지.
말을 잇던 카이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사냥매'가 '에덴'을 싫어하는 건, 약육강식의 논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곳의 삶이 인간다움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고독한 겉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카이로스와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나]
하지만 에덴에 들어온 능력자들은... 그저 아름다운 삶을 동경하는 것뿐이죠? 야심을 위해 에덴에 들어온 사람도 있겠지만, 능력자 조합의 사람들은 그저 쉴 수 있는 곳을 찾는 것뿐이에요...
이야기를 꺼내며 카이로스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나]
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카이로스]
능력자 조합을 말하는 거야?
[나]
그들과 함께 싸우고 싶어요. 방랑자를 모두 물리치고 나면, 에덴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뀔 수 있을 거예요.
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카이로스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날 순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카이로스는 내 눈을 바라봤다. 한참 뒤, 그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카이로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너 같은 사람이 흔치 않아. 하지만 그런 네가 싫진 않아.
카이로스가 말을 이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카이로스]
너에겐 용기도, 그릴 힘도 있어.
[나]
힘이요?
[카이로스]
여러 번의 전투에도 다치지 않았잖아, 회복 상태도
좋고. 게다가 네 그림, 멋졌어... 무척 마음에 들어.
카이로스가 옆에 있던 바이크를 가리켰다.
[카이로스]
가자, 다들 샘물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
카이로스의 도움으로 블랙 스트릿에 돌아온 나는 모두에게 샘물을 나눠준 뒤, 작별 인사를 나눴다.
[카이로스]
자정에 있을 전투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치르려면 최대한 빨리 쉬는 게 좋을 거야. 디데이까지 이를 남았어. 내 추측이 맞다면 오늘 밤 대부분의 사람이 탈락할 거야.
[나]
오늘 밤에도 와 줄 거에요?
말을 꺼냄과 동시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카이로스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런 그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한 건... 조금 지나진 요구였다.
[카이로스]
올게.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카이로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런 카이로스를 향해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로스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카이로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에덴에 들어온 데 별다른 목적 같은 건 없었어.
[나]
목적이 없었다고요?
[카이로스]
난 그저 둘러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사막 말고 다른 풍경을... 엘리사가 말한 이상향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그러니까 내 목표는 이룬 셈이지.
에린은 카이로스가 방랑자와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건 전력을 유지하기 위한 작전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이 순간, 카이로스는 내게 진짜 이유를 말해주었다.
[카이로스]
내가 전투를 피한 건, 에덴에서의 싸움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어.
[나]
하지만 밤에 블랙 스트릿에 와준다면서요?
[카이로스]
응, 지금은 달라졌으니까. 적어도 네가 어이없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아까 네가 싸우는 이유를 말해줬잖아. 그 얘기... 재미 있었어. 에덴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겠다... 순진한 이야기지만 싫지 않아. 게다가 카운트다운이 끝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
힘낼게요.
카이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크에 올라탔다.
[카이로스]
간다,푹쉬어.
말을 마진 카이로스는 바이크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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