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장미

2024. 5. 12. 17:05다음 역, 에덴/사냥매 (카이로스)

 석양빛으로 물든 블랙 스트릿. 클라우드에게 저녁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 탁한 후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던 찰나... 가벼운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

드디어 찾았네요. 

 

 고개를 돌리자, 석양 아래 흰 옷차림의 알카이드가 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알카이드의 손에는 붉은 장미와 분홍 장미로 한가득 채위져 있는 꽃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꽃잎에 물방울이 맺힌 걸 보니 방금 딴 게 분명하다. 

 

[알카이드]

귀찮은 일이 생기면 절 찾아오라고 했는데.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서 직접 와봤어요. 

 

 여기서 알카이드를 만나게 되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있다. 로샤는 어떤 위험이 닥쳐도 알카이드에게 도움을 청해선 안 된다고 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지? 경계해야 하나? 

 

[나]

귀찮은 일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알카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내 거짓말을 알고 있다는 듯 손에 난 상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에 든 꽃바구니만 가만히 위로 들었다. 

 

[알카이드]

요 며칠 옛날 책을 좀 봤어요. 평화의 시대에는 좋아하는 상대에게 장미를 줬다고 하더군요. 

 

[나]

제게 주는 건가요? 

 

[알카이드]

꺾은 꽃은 오래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받아주지 않을래요? 

 

알카이드의 꽃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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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1. 낙원의 꿈

 흰 정장의 청년은 장미꽃을 든 채, 꺾은 꽃은 오래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별생각 없이 알카이드의 장미꽃을 받아들었다. 

 

[알카이드]

잘됐네요. 저희 집으로 가죠. 제라늄 차를 끓여드릴게요. 

 

 왠지 모르게 알카이드의 말이 아찔하게 들렸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유려한 그의 윤곽을 드러냈다. 그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알카이드의 정원에 발을 디뎠다. 이곳은 에덴의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존재 같다. 생기를 머금은 꽃, 정성스레 손질된 식물. 정원의 분수에선 시원한 물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알카이드가 문을 열며, 내게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곳이었다.

 알카이드는 내게 제라늄 차를 끓여줬다. 필필 끓는 물속에 떠오른 흰 꽃잎에서 그윽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맑고도 진한 향기, 짙지도 연하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은 정도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그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알카이드]

피곤하면 눈 좀 붙여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연이은 전투로 피곤했던 나는 깊이 잠들고 말았다. 

 

-

 

 아주 오랫동안 잠들었던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에덴에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앞에서 무슨 목표를 이루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누군가와 그런 약속을 했는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청년]

괜찮아요 차라리 잊는 편이 더 좋은 일도 있잖아요. 모든 게 좋아질 거예요.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 우리가 에덴에 있는 한...

 

 청년은 내 앞에 선 채, 따뜻하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년]

이 낙원에서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고요. 제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래요. 

 

 그의 말이 옳다. 에덴에는 무엇이든 다 존재한다. 내게 잊혀진 것들은 분명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겠지. 잃어버린 기억은 깨끗하게 잘려 나간듯 더는 되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END.

 

 

>받지 않는다.

장미꽃을 든 알카이드는 에매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방금 그의 말은 연인 간의 고백에 가깝다. 석양빛이 그의 얼굴의 윤곽을 비추었다. 희미한 웃음에서는 씁쓸하지만 솔직한 마음이 느껴졌다. 꺾은 꽃은 오래가지 못하니, 받지 않는다면 전부 버려질 것이다. 살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에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될 수 없는 이야기니까.

 예신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알카이드, 카이로스, 아인, 로샤, 이 네 사람은 각 세계의 '특수인'이라고. 그렇기에 에덴에서 만난 알카이드 역시, 평범한 능력자는 아니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능력자가 에덴에 모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생존, 혹은 야심... 그리고 에덴에서는 매일 밤 험난한 시련이 필쳐진다. 하지만 지금의 알카이드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정원에서 지내다가, 장미꽃을 들곤 내 앞에 나타나 초대의 말을 건넸다... 아무리 봐도 너무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서 알카이드와 신경전을 벌일 시간이 없었다. 

 

[나]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꽃은 못 받을 것 같네요. 이제 곧 날이 어두워져서, 전투를 준비해야 하거든요. 

 

[알카이드]

그렇네요. 위험한 전투가 벌이질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게 초대받았으니, 제 정원에 와도 돼요. 그 안에 발을 디디고 나면, 어떤 괴물도 당신을 해치지 못할 거예요. 

 

 알카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미소와 달리, 그의 행동은 다소 거칠었다. 알카이드가 내 손을 잡아당기려 했다. 난 바짝 긴장한 채,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에린]

무슨 일이야? 

 

 다음 순간, 에린이 날 보호하기라도 하듯이 내 앞에 나타나 나와 알카이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에린]

누구시죠? 무슨 볼일로 오신 거죠? 

 

 에린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알카이드를 쳐다봤다. 알카이드를 처음 보는 듯했다. 

 

[알카이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제 손님이기도 하죠. 저의 집으로 초대하던 중입니다만. 

 

 그 말에 에린이 순간 당황했다. 평소에 '좋아한다', '초대' 같은 말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거겠지. 에린이 고개를 돌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날 마주 봤다. 

 

[에린]

너도 저 사람이 좋아? 

 

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린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고는 차가운 얼굴로 알카이드에게 한층 싸늘하게 대답했다.

 

[에린]

제 친구가 싫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그만 떠나주세요. 

 

 에린은 수줍음도 많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에린을 마주한 알카이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서늘한 빛이 그의 얼굴에 서서히 떠올랐다. 불쾌한 기분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집어삼기더니 급기야 그의 푸른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알카이드]

무척 불쾌하군요. 제 손님에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블랙 스트릿이 없어지면 당신의 친구도 사라질 테고, 그러면 제 집을 찾아 주시 겠죠? 

 

 알카이드의 눈동자가 먹물처럼 진하게 가라앉았다. 담담한 음성과 달리 날 선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눈빛에 담긴 분노에 온몸이 식어내리는 것 같았다. 

 

[나]

"블랙 스트릿이 없어진다"는 게 무슨 뜻이죠? 설마... 블랙 스트릿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알카이드]

저와 같이 저희 집으로 간다면, 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알카이드의 눈빛에 덜컥 겁이 났다. 알카이드는 에덴에서 대체 어떤 자리에 있는 걸까? 정말 이곳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는 걸까? 잠시 망설였지만, 알카이드의 제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나]

좋아요 가볼게요. 대신 오래 머물진 않을 거예요...

 

[에린]

저 남자를 따라가면 안 돼. 위험한 사람 같아. 

 

[나]

저 남자는 능력자 조합 사람들을 해칠지도 몰라...

 

[에린]

그러니까 더더욱 가면 안 되지. 

 

 에린이 손을 내밀어 내 손을 힘껏 잡았다. 알카이드가 우리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힘을 분산하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알카이드는 내게 두려움을 선사했다. 백의의 신사 차림의 그는 깔끔하게 손질된 푸르른 정원을 짓고,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미소짓는 얼굴로 장미를 건네며 나를 초대했지만, 에린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블랙 스트릿에 있는 내 친구들을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감정의 기복이 너무 컸다. 게다가 '특수인'의 법칙으로 본다면, 그는 분명 강한 힘을 지났을 것이다. 그런 그를 거절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좋지 못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나]

알카이드, 당신을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알카이드에게 다가가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나]

평화의 시대에선, 자신이 지내는 곳으로 누군가를 초대할 땐 생명을 위협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아요.

 

 이건 도박이다. 알카이드가 '평화의 시다에 걸맞은 꽃바구니로 날 초대했으니, 나 역시 그 시대의 규칙에 따라 맞설 생각이다. 알카이드가 즉시 손을 쓸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혹시라도 내 추측이 들렸다면 여기서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한참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알카이드는 결국 아무 말도 없이 꽃바구니를 든 채 골목 모퉁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긴 한숨을 내쉬있다. ...내가 이겼다. 

 에린이 내게 다가왔다. 

 

[에린]

신경 쓰지 마. 그냥 큰소리만 친 걸 거야. 블랙 스트리트에 능력자가 얼마나 많은데 여길 무너뜨리겠다니...

 

[나]

응... 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만나게 된다면 모두들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에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준다면, 오히려 모두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카이로스가 '외로운 사냥매'가 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가 내게 블랙 스트리트를 떠나라고 할 때는 듣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 의지로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혼자 행동해야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야 카이로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에린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패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에린]

폐는 아니지만... 네가 이상한 사람과 엮여 있을 줄은 몰랐어. 아까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지만... 내가 무례하게 굴었다면 미안해. 

 

 에린은 잠시 생각에 잡기더니 날 향해 씽끗 윙크했다. 

 

[에린]

그 알카이드라는 사람이 널 '좋아한다'고 했지. 

 

[나]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인가? 

 

[에린]

그럼! 보통은 서로의 조건을 확인한 후에 후손을 가져. 감정은 중요하지 않지. 대부분의 능력자는 대를 이으려 하지 않아. 세상이 위나 위험하니까. 

 

[나]

......

 

[에린]

하지만 넌 사냥매를 좋아하지? 

 

[나]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야? 

 

[에린]

사냥매와 너, 두 사람은 특별하니까. 거기다 무척 닮았어. 

 

[나]

글쎄, 지금은 그냥 자고 싶어. 그래야 밤에 방랑자를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난 잽싸게 뒤로 물러나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나]

난 이만 가서 쉴게! 

 

 한달음에 윗층으로 올라온 뒤 방에 돌아와 쉴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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