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1. 20:11ㆍ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1년 뒤, 우리 마을이 치안이 좋고 살기 편한 곳이라는 소문은 멀리까지 퍼졌다. 우리는 뒤늦게 앤더슨, 노바, 주니 등 옛 동료들도 찾아 이곳으로 데려왔다. 강림 마법진을 지탱하고 있던 로샤와 카이로스, 그리고 마법사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한 재 희생된 듯했다.
얼마 후, 평온한 세계에서 맞는 첫 겨울이 시작됐다. 이곳의 겨울은 에르세르의 끔찍한 혹한과는 달랐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말 그대로의 겨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지역에서 건너온 무뢰배나 산적의 노략질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인이 있다. 그는 앞장서 혼란을 정리했고, 연고도 재산도 없어 약탈을 저지르던 이들을 교화시킨 뒤 받아들여주었다. 사회 구성원이 늘어났다는 것은 아인의 일거리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내게도 일거리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자기가 이 자리에 앉은 건 순전히 내 권유 때문이니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나. 내 일은 점점 늘어나, 도망가려 해도 그럴 시간이 없어 못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
아무리 봐도 약았어. 날 붙잡아두려고 이렇게 일을 시zl는 거죠?
[아인]
약속했잖아, 계속 함께하기로.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로 한 거 잊었어? 내 모든 걸 너에게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아.
[나]
아하. 과로와 강제 새벽 기상, 그리고 숱한 민원들까지 말이죠?
[아인]
네가 있을 곳은 내 곁이라며.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내키지 않으면 그만뒤. 내가 다 하지 뭐. 대신 오늘부터 나는 밤새 일하느라 잠잘 시간도 없겠군.
[나]
이리 줘요!
매일매일 함께 일하고 떠들고 웃으며, 우리는 그 겨울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바람이 부쩍 따스해지고 새싹들이 움트는가 싶더니, 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새로운 세계의 낯선 꽃들은 유난히도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아인]
드디어 봄이군.
[나]
아아, 따뜻해. 끝나지 않는 겨울은 없대요.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봄이 오고 꽃도 피는 법이죠.
만개한 꽃을 보며 이전 세계에서 흔히 하는 말을 하는데, 아인은 돌연 얼굴을 굳혔다.
[아인]
글쎄.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엔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인]
거기서 잠든 사람들의 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
나는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인이 맞다. 얼음 나비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전사한 병사들, 그리고 신세계를 위해 기꺼이 제 생명을 희생한 이들... 그리고 돌아가신 아인의 부모님들까지.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것 같았다.
[나]
미안해요, 아인...
[아인]
그러지 마. 왜 그런 소릴 해. 내게 용기가 필요할 때, 승리를 향한 투지가 절실할 때, 그때마다 넌 내 뒤를 든든히 지켜주었지. 네가 없었다면 나... 아니, 우리는 영영 봄날을 맞이할 수 없었을 거야.
아인은 더없이 진지했다.
[아인]
과거는 과거야. 아무리 괴로워도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어. 그러니 괴로울 때면 일부러 기쁜 일, 좋은 것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이를테면, 너라는 존재 말이야.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이 변화와 소생의 이야기가 노래로 불린다면... 그 가사엔 분명히 네 이름이 들어가 있을 거야.
우리는 봄기운이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우리도 웃으며 화답했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지겠지.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맞은 봄.
처음 보는 새가 머리 위를 빙그르르 돌더니 푸르른 하늘을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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