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갈등

2024. 1. 24. 19:25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아인이 적을 상대하던 중, 한 마법사가 그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집행인 부대 사령관을 알아보고서 격분했다. 

 

[마법사]

죽어라, 제국의 개! 

 

 마법사의 기합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마법 광선이 아인에게 쇄도했다. 아인은 재빨리 공격을 피한 뒤 역공을 펼찼다. 아인을 공격했던 마법사는 단칼에 쓰러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아인이 피했던 마법 광선이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아인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 공격을 받아쳐냈다. 마법사의 집념이 깃든 공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몇 걸음이나 밀려날 정도였다. 그 바람에 다 막아내지 못한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날카로운 통증이 즉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아인은 마법사를 처리하고서 빠르게 내게로 달려왔다. 

 

[아인]

무슨 짓이야! 위험했잖아! 

 

 내 상처를 본 그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어렸다. 

 

[아인]

왜 자꾸 나서는 거야! 다치기나 하고! 

 

 자칫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뒤늦게 두려위진 나는 손으로 목의 상처를 감쌌다. 그때, 복도 저편에 누군가가 지나갔다. 익숙한 실루엣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인]

또 무슨 일이야? 

 

[나]

방금 로샤가 지나갔는데...! 혹시 내가 힘을 쓰는 걸 봤을지도 몰라요! 

 

아인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후, 그는 차분하게 지시했다. 

 

[아인]

방으로 돌아가. 나는 로샤에게 가볼게.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얌전히 있어. 

 

아인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 몸을 돌렸다. 

 

[나]

아인! 당신은... 괜찮은거죠?

 

 나를 돌아본 그의 눈빛엔 그늘이 져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를 떴다. 

 

-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아인은 로샤를 호위하러 갔을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 그는 원수의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위선을 다 떨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가늠이 안 된다. 아까 나를 떠나던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까지 아인을 살게 한 원동력은 복수심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지금이라도 그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을 겪은 뒤 내내 마음 붙일 곳 없었을 터다. 그런 그의 곁에 내가 있어준다면, 어쩌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기를 얼마쯤, 시녀가 들어와 황제의 부름을 전했다. 마법사의 반란은 얼추 정리된 모양이다. 

 

-

 

 회의장 단상 위에는 황실과 마탑의 맹약을 과시하려는 듯 로샤와 카이로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오늘 사태에 놀란 티가 역력한 귀족들이 소집되어 있었다. 나는 옷깃을 세워 목의 상처를 꼼꼼히 감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샤]

오, 나의 신부여, 어서 오시게. 대수롭지 않은 소동에 놀라진 않았겠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가장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회의장 구석에서 검은 망토 차림의 아인을 발견했다. 그는 얼굴을 다 가린 채 그림자처럼 서 있기만 했다. 로샤는 이번엔 놀란 귀족들을 돌아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샤]

사대는 모두 정리되었는데 왜들 아직도 불안해하지? 내일은 성대한 연회를 열 것이다. 모두가 기다리는 무도회도 열지. 

 

 그럼에도 귀족들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듯 계속 수군거렸다. 

 

[베셀 공작]

하오나 폐하...

 

[로샤]

베셀 공작, 짐에게 할 말이 있는가? 

 

[베셀 공작]

폐하, 신이 감히 폐하의 원대한 계획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옵고, 어디까지나 염려되는 마음에 한 말씀 올립니다. 폐하께서 저희들을 황성에 들여 각별히 보호해주시는 은혜가 하늘보다 높으나, 툭하면 이성을 잃는 마법사들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선 원성이 자자합니다. 

 

[로샤]

호오, 마탑의 보호를 받는 건 좋지만 마법사는 원망스럽다? 카이로스 경, 그대가 듣기엔 어떠신가? 짐의 귀에는 개가 짖는 소리로 들리는데 말이야. 

 

[베셀 공작]

폐, 폐하...!!! 제,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로샤]

편히 살다 보니 배로는 모자라 머리통에도 기름이 낀 모양이군. 그 머리통으론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니 짐이 친히 알려주겠다. 5년 전 이 단상에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피가 지금 그대들이 누리는 평화의 대가가 아니던가. 됐네, 신부의 앞에서 피를 볼 순 없으니, 특별히 오늘은 참겠다. 다들 물러가거라. 

 

로사는 싸늘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나]

폐하,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로샤]

그대는 남도록. 할 말이 있다. 

 

 로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불안해졌다. 아인은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며 귀족들과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북적이던 공간엔 나와 로샤만이 남았다. 나는 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예의로 무장했다. 

 

[나]

말씀하시죠. 

 

[로샤]

아주 서먹한 말투로군. 멀리까지 가서 노느라 지치기라도 한 건가? 좀 전에도 계속 넋을 놓고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데, 그 눈에 누굴 담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내 외출을 로샤가 눈치겠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와 함께 나갔는지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둘러댔다. 

 

[나]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긴장돼서요. 저는 이런 환경에 익숙지 않아요. 

 

[로샤]

그래? 그건 그렇고, 아인과 붙어 다니며 부쩍 친해진 것 같던데.

 

[나]

무슨 말씀이신지. 폐하께서 절 감시하라고 친히 붙여주신 이가 아닌가요? 그가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 겠지요. 그리고... 세상에 사이좋은 죄수와 간수가 있을까요? 

 

[로샤]

...우스갯소리도 참 잘하는구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로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로샤]

짐은 그대가 이 황궁에서 평온히 지내기를 원하지만, 모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군.

 

 로샤는 성큼 다가와 내 목덜미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 바람에 상처가 벌어져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로샤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머금고서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로샤]

문제가 생긴다면 짐이 몸소 나설 것이다. 명심해라, 그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짐의 신부라는 걸. 

 

나는 침묵을 지켰다. 로샤는 흥이 깨졌는지 손을 거두었다. 

 

[로샤]

물러가라. 

 

 끝까지 로샤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나는 곧장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

 

 아까 그 복도에서 로샤가 모든 걸 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나는 조급해진 나머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힘껏 달렸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서 아인에게 가고 싶어!

 

-

 

 침전으로 돌아와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꼭 쥐고 있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문을 꼭 닫으려는데, 검은 인영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이곳까지 달려오는 내내 맘속으로 그리던 아인이었다! 침실 문을 잠그고 돌아선 아인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로샤와 나눴던 대화를 알려줬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아인은 내가 하는 이야기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

로샤가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쓸데없이 문제 만들지 말고. 

 

[아인]

쓸데없는 문제...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져, 나는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상기시켰다. 

 

[나]

당신이 그랬잖아요. 나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라고. 광대나 보모 역할은 사절이라고. 그러니...

 

[아인]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바보야! 

 

 순간, 아인의 눈동자에서 위태로운 빛이 어른거렸다. 나는 놀라 그에게 다가섰다. 

 

[나]

아인...?

 

 내 걸음보다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아인은 힘껏 내 팔을 잡고서 제게로 끌어당겼다. 상처가 스졌는지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홀리고 말았다. 핏물에 젖은 내 옷깃을 보는 아인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아인은 나보다 더 아픈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상처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부상을 입었을 때보다 더 뜨겁고 화끈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해 말초까지 퍼져 나갔다. 더없이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감촉에 나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윽고 아인은 내 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아인]

황후가 되거라. 아니, 황후가 되어줘. 그 자식이 아닌, 나의. 모든 걸 끝낸 뒤 반드시 널 내 황후로 맞이하겠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나]

아아, 아인! 안 돼요! 나, 독약을 마셨잖아요! 그러니 내 피에도 분명 독이...! 

 

 아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아인]

그거, 겁주려고 거짓말한 거야. 그냥 메이플 시럽.

 

[나]

아인 전하께서는 속임수의 귀재시군요...

 

 나는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곳엔 마치 폭풍전야같은 고요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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