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024. 5. 13. 00:35비밀의 여정/추억 편

[예신]
사실, 나는 사랑을 위해 그 많은 대가를 치른 네 엄마를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 그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막을 수 없었을 뿐. 네 엄마는 내가 속한 세계에서도 최강자였단다. 그녀는 내 상관이자 생명의 은인이었기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네 엄마는 내게 '피난처'를 구축해달라고 했지. 
 
[나]
피난처...? 
 
 설마... 세인트셀터와도 관련이 있는 건가? 셀터(shelter)는 피난처, 대피소란 뜻이니까.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직후, 엄마는 '피난처'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엄마는 '여행자였다. '여행자란 각 평행세계를 무한히 드나들 수 있는, 평행세계의 유일한 개체를 일컫는 말이다. 
 '여행자'는 예신과 엄마가 살던 문명 세계에서도 몇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나는 '여행자'와 한 평행세계의 평범한 지적 생물체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체라 더욱 특별했을것이다. 그러니 내 존재가 알려진다면 나는 그곳으로 끌려가 실험체 취급을 당할 것이 불을 보듯 원했다. 내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엄마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신]
그녀는...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너 역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아이와 다르지 않다고 했어. 
 
 그러나 피난처 계획을 실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엄마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 장벽을 세웠다고 했다. 그것은 엄마가 속한 세계의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지구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벽이었다. 계획의 최종 단계는 엄마가 속해 있던 세계와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제가 속한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여행자'는 서서히 쇠약해지고 더 이상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망설이지 않고 능력과 수명, 그리고 편안한 미래를 내던졌다. 오직 단 하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 생명이 평범하게 살고 행복을 누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예신]
그녀는 네가 이런 사실을 알길 원치 않았어. 그녀가 네 기억에서 많은 것을 지운 이유 역시, 너를 위해서였지. 너의 출생과 기억은 온통 '평범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니까. 그녀는 네가 그런 데 영향받지 않기를 바랐어. 네 엄마는 네가 이 세상의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이라고 내게 수없이 강조했단다. 
 
예신은 히아신스가 핀 산비탈에 눈길을 던졌다. 파란 꽃들은 부드럽게 흔들리며 싱싱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예신]
어떤 선택을 하든, 너는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태어난 생명이라는 걸 잊지 마럼. 나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목숨까지 걸어가며 너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알 것도 같더구나. 
 
-
 
 예신은 나를 다시 셀레인 섬으로 데려다주었다. 세인트셀터 학원...

 예신이 꺼낸 서류봉투에는 로샤, 알카이드, 아인, 카이로스, 이 네 사람의 상세한 자료가 들어 있었다.  '피난처' 계획은 이 세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동시에, 우월한 문명에 발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신]
이들은 '특수인'이야. 우리의 연구로는 아직 명확한 논리나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각 평행세계에 위기가 도래할 때마다, 그 위기의 중심에 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에르세르에서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예신은 네 사람을 감시하고 관찰하기 위해 그들을 세인트셀터로 집결시켰다. 세상에 이변이 생기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즉 세인트셀터는 '피난처의 전초'인 셈이었다. 예신이 이곳에 남은 것은 피난처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일 테고. 
 
[나]
그들이 내게 영향을 끼칠테니 거리를 두라는 뜻인가요?
 
[예신]
그릴 필요는 없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야. 이 세계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야. 지금의 그들은 그저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일 뿐. 인연이 닿는다면... 너는 그들 중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겠지. 그게 바로 너희 엄마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말이야.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날 밤, 하늘엔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예신은 미소 지으며 작별을 고했다. 
 
[예신]
나는 조만간 학교를 떠날 거야. 대외적으로는 해외 연수를 가는 것으로 되어 있지. 
 
예신이 떠난다니...
 
[나]
다른 '임무'가 있는 건가요?
 
[예신]
아니, 당분간 임무는 없을 거야. 
 
[나]
그럼...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건가요?
 
[예신]
지금의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아. 캠퍼스 생활 즐겁게 누리렴. 지금의 나는 너를 불편하게 만들뿐. 물론,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즉시 돌아올 거야. 
 
[나]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예신에 대한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예신이 에르세르에서 한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오래도록 나를 지켜주고 보살펴준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나]
그리고 나는... 예신이 두렵지 않아요. 
 
[예신]
그거 다행이구나. 하지만. 어쨌든 나는 네 세상의 사람이 아니야. 더 이상 네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 너는... 네 의지대로 살아가렴. 
 
 예신의 엷은 미소는 언제나 그랬듯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예신]
너의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지. 네 엄마가 원했던 것처럼 나도 네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잘 있어.
 
예신은 내게 손을 흔든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달빛 아래 길게 늘어난 그의 그림자에선 선명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하늘은 맑고, 별들은 밝았다. 나의 앞날 역시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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