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눈보라

2024. 3. 24. 00:30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고요해진 설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카이로스]
아무것도 안 남았군. 
 
 그 말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지, 다른 뜻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눈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카이로스는 홀로 중얼거렸다. 
 
[카이로스]
이런 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그들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할지, 그런 것만 줄곧 생각했거든. 원망하고 비난할까, 아니면 용서하고 축복할까. 혹시 주책없이 반가워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만 했지. 하지만 다 상관없어졌네. 조금... 허무한걸.
 
 카이로스는 탈진해 눈밭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얼음 나비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이렇게 추운 곳에서 정신을 잃으면 위험해. 마음이 급해져 카이로스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았다. 
 
[나]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요. 약속했잖아요, 살아남기로. 
 
 카이로스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전해주고 싶어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기운을 북돋아줄 만한 말을 골라 속삭여주었다. 
 지쳐 나가떨어진 카이로스는 갈 곳을 읾은 사람처럼 보였다. 돌아갈 곳도, 목적지도 한순간에 없어져버린 사람.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에증으로 남아 있었을 가족들의 죽음 탓일지도 모른다. 잠든 줄만 알았던 카이로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맞잡고서 입을 열었다. 
 
[카이로스]
난 괜찮아. 이런 걸로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카이로스는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맞물려 단단히 깍지를 꼈다.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카이로스]
잘은 모르지만, 내게 정체를 보이면 곤란한 거지? 눈을 감고 있을게. 오랜만이야. 그리고 함께 싸워줘서 고마워. 너는 정말이지... 내게 절망할 기회를 주질 않는구나. 
 
카이로스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카이로스]
나는 줄곧 혼자였지만, 널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혼자라고 느껴본 적 없어. 그러니 괜찮아. 안심해, 난 살아갈 테니까. 네가 그러길 바라는 한, 나는 살아남을 거다. 나를 찾아서 아주 멀리에서 왔다고 했지. 그렇다면 너도 혼자겠구나. 그런 널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약속할게.
 
 카이로스는 간신히 양손을 들더니 내 손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차가운 눈밭에서 전해지는 카이로스의 손바닥의 열기는 그가 절대 눈밭에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설원에서의 시간은 찰나 같기도 하고, 또 한참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안개가 밀려들었다. 싫어도 떠나야 할 시간. 다른 시간의 카이로스에게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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