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3. 20:31ㆍ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카이로스 휘하 마탑 9성 중 1인인 알로라의 위엄은 굉장했다. 마법 주문이나 마력이 깃든 영물 따원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입을 벌리고서 순수한 욕망을 채울 뿐이다.
탐식. 배고픔에 울다 부모에게조차 거부당해 딱딱한 돌을 주워 먹어야 했던 소녀는... 강한 마법사가 되고도 끝내 허기를 달래지 못했다. 알로라가 발산하는 강한 마력 파동이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자, 거기에 휘말린 폭주 마법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들은 이내 공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작은 조각조각으로 부서지더니 알로라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알로라는 쉬지 않고 먹어치웠다. 슬프고도 절박하게 허기를 재우는 그녀는... 먹어선 안 되는 강가의 돌을 주워 먹어야 했던 그때와 같았다. 알로라의 팔에 하얗게 얼음 결정이 맺혀 있다. 설마...! 폭주하려는 걸까?
당황하던 참에, 뒤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돌아보니 카이로스였다. 황성의 대규모 전투를 지휘하러 간 그가 왜 이곳에..! 알로라를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카이로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상황을 빨리 끝내려고 저쪽은 내가 직접 해결했다. 역시. 마력을 거의 다 소모했군. 편하게 보내주는 게 이 아이를 위하는 길.
카이로스는 쓰러지는 알로라를 받아 안았다.
카이로스의 손끝에 푸르스름한 마법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잠깐만요, 카이로스!
나는 다급하게 카이로스의 팔을 붙잡았다.
[나]
이걸 봐요! 괜찮아지고 있잖아요!
알로라의 몸을 뒤덮어가던 얼음 결정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알로라]
언니... 언니, 알로라... '그때'가 온 것 같아요. 그치만... 얼음 나비로 변하긴 싫어. 알로라는 알로라인 채로 모두와 인사할 거야. 알로라... 아저씨를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요. 아저씨의 노래를 들으면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카이로스 님... 알로라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실 거죠?
카이로스는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
폭주하고도 제 모습을 유지하다니...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구나, 알로라.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줘야겠지. 편히 잠들거라.
카이로스가 손을 들자, 허공에 빛의 물결이 떠올랐다. 그 물결은 점점 거울의 모습으로 변했다. 황궁의 수면 거울을 이쪽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걸 보는 순간, 슬픈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괜찮은 걸까? 카이로스는 조나단 이사장의 속내를... 알고 있나? 나는 알로라를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알로라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사장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텐데.
거울에 이사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나단]
알로라...! 너... 괜찮니?
[알로라]
으응. 아저씨, 알로라 괜찮아요. 그런데, 조금 힘드네요...
이사장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감정은 이미 격해져 있지만, 그걸 드러냈다간 알로라를 놀라게 할까 봐 어쩔 줄 몰라 했다.
[조나단]
알로라! 알로라...!
[알로라]
아저씨, 알로라에게 그 노래를 들려줘요... 어제 알려준노래... 잊어버렸어...
[조나단]
그래, 알로라...
거울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조나단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이사장의 흐느낌에 묻혀 제대로 이어지질 않았다.
[알로라]
고마워요, 아저씨... 알로라 배불러... 아프지 않아.. 이...제... 편해... 모두... 잘 자요...
알로라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녀는 꼭 따스한 햇살 아래서 잠든 것만 같았다. 지극히 평온한, 그래서 더 안쓰러운 이별이었다.
순간, 수면 거울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거울 저편으로부터 맹렬한 바람이 불어닥졌다. 바람은 알로라의 시신을 휘감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카이로스는 상황이 심상찮음을 즉시 파악하고서 한 손으로 방어 마법진을 치고 다른 손으론 거울을 자단하려 했다. 대마법사의 마력과 정체 모를 바람이 충돌하며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공명을 일으켰다. 거센 폭풍에 대지가 쩍쩍 갈라지며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카이로스의 표정이 드물게 심각해졌다. 황성의 전투에서 마력을 크게 소비하고 온 탓인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혔다. 나도 그를 도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로라의 시신을 거울 너머로 뺏긴 것이다! 이는... 조나단 이사장이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열었다는 뜻이다. 지축이 흔들리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환상을 통해 보았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막으려야 막을 길이 없어 보였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카이로스를 돌아보았고, 그는 금세 내 의도를 눈치채고서 소리쳤다.
[카이로스]
내가 최대한 통로를 열어두고 있겠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니 서둘러!
그를 항해 신뢰의 눈빛을 보낸 나는 곧장 거울로 뛰어들었다. 미지의 공간에서 강력한 바람이 내 정신을 온통 휘저어댔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럽던 그때, 카이로스의 목소리가 등대처럼 방향을 알려주었다.
[카이로스]
너의 세계로 가. 그리고 반드시 돌아와라.
'에르세르 대륙(完) > 전승의 장 (카이로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화. 지하 실험실과 광기 (0) | 2024.03.23 |
---|---|
11화. 나의 세계로 (0) | 2024.03.23 |
9화. 알로라 (0) | 2024.03.23 |
8화. 수면거울 (0) | 2024.03.23 |
7화. 탐식 (0) | 2024.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