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수면거울

2024. 3. 23. 20:30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얼음 나비를 모두 해치운 알로라는 풀썩 쓰러졌다. 아이가 배를 움켜쥐고서 고통스럽게 바닥을 뒹구는데도, 누구 하나 도와주려 나서는 이가 없었다. 

 

[집행인 병사]

또 폭주인가. 하여튼 불길한 놈들이야. 

 

 알로라에게로 달려가는 내 귀에, 한 집행인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닿았다. 힘 있는 병사조차 이러는데 일반인은 어떻겠는가. 모두들 마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꺼린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알로라를 안아 올렸다. 탐식의 마법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몹시 야위어 있었다. 

 

-

 

 마차 안, 알로라는 내 품으로 파고들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알로라]

알로라는 먹는 게 너무 좋은데, 흑! 다 먹고 나면 배가 너무 아파... 흐혹! 아아, 너무 아파...아파서 죽을 것 같아, 언니, 도와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로라가 움켜쥔 내 팔에 손톱자국이 신명하게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안고서 달래주는 것밖에 없었다. 알로라는 한참이나 그렇게 울다 지쳐 잠들었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알로라를 치료 마법사들에게 인계하고 내 처소로 옮겨달라 부탁했다. 그러고서야 겨우 한숨 돌리는데, 우연히 알카이드를 마주쳤다. 

 

[알카이드]

신녀님, 조사에는 진전이 있으십니까?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알로라와 한나절을 보냈으니까. 

 

[카이로스]

누구에게든 쉽게 휘둘려 제 할 일을 망각하는 자가 뭔들 제대로 할까. 마탑 견학이라면 또 모르겠군. 

 

[알카이드]

예하,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자기 일을 미루면서까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녀님은 강한 신념에다 따뜻한 마음까지 겸비한 분이 라고 생각됩니다. 큰 힘을 가졌으면서 그런 덕목까지 갖추기는 힘들죠. 예하, 부디 신녀님을 너그러이 봐주세요. 분명 에르세르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내실 겁니다. 

 

 알로라가 걱정된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등 마는 등 하다 자리를 피해버렸다. 알로라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댄 순간, 심상치 않은 한기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몸이 얼음장 같았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가까워졌다. 익숙한 발소리, 카이로스였다. 

 

[나]

카이로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알로라에게 무슨 일을 할 셈이죠?!

 

카이로스는 무감한 눈으로 알로라를 내려다봤다. 

 

[카이로스]

걱정하지마라. 지금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그 아이에게 마음 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마력 폭주까지 얼마 남지 않았거든. 폭주한 마법사는 안전을 위해 제거해아만 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이 규칙. 알로라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제법 오래 버틴 편이지. 

 

 폭주한 마법사는 안전을 위해 제거한다... 마치, 고장 난 기계 부품을 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나]

강한 마법사가 폭주하면 어떻게 대항하죠? 마탑 9성 중 생존자가 몇 없는 걸로 아는데, 혹시... 당신이 직접 손을 쓰려는 건가요? 

 

 카이로스는 침묵했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법사의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 그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흐름을 카이로스는 지금껏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나]

여긴 내가 있을게요. 가세요. 지금은 그냥 자고 있는 것뿐이에요, 아직 폭주한 게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나는 카이로스를 외면하고서 알로라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알로라]

추워...

 

 알로라는 잠결에도 내 손을 꼬옥 마주 잡고서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알로라를 감싸 안고서 같이 벌벌 떨었고, 카이로스는 그런 우리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내쉰 후 우리에게 마법을 걸었다. 몸이 갑자기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알로라]

아아... 너무 따뜻해...

 

[카이로스]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다고 해서 막아질 일이 아니야. 

 

 애써 친절을 베풀어놓고서 미운 소리만 내놓은 카이로스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알로라는 한결 편한 표정으로 단잠에 빠졌다. 

 

-

 

 알로라를 좀 더 지켜본 뒤, 나는 방을 빠져나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산책 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또 단풍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카이로스를 발견했다. 다가오는 나를 본 그는 웬일로 눈인사를 다했다. 단풍나무 아래의 카이로스가 유독 달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그의 곁으로 간 나는 담담히 말을 걸었다. 

 

[나]

볼수록 멋진 나무네요. 내가 살던 곳에서 이런 단풍은 가을에나, 그것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구경할 수 있었어요. 매일매일 여기 오는 것 같은데...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요? 

 

카이로스는 한참 만에야 입을 뗐다. 

 

[카이로스]

여러 생각들을 하지. 약속과 기대, 그리고... 형체 없는 그리움, 지루한 기다림, 혹은...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두지. 공기가 차다. 들어가 일찍 숴도록 해. 

 

 고운 빛을 띈 단풍나무 탓일까. 카이로스의 말이 꽤나 다정하게 들렸다. 카이로스가 기다린다는 그 의문의 존재가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일지, 여자일지, 또 어떻게 생긴 사람일지... 잘은 몰라도 분명 따뜻한 사람일 것 같다. 

 

[나]

잘 자요. 카이로스.

 

나는 단풍나무 아래 카이로스를 남겨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

 

 알로라는 다행히도 잘 자고 있었다. 알로라가 폭주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알로라도 카이로스의 손에 사라지려나... 서글픈 현실이다. 둘 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알로라의 손을 꼭 잡고서 누웠지만,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마탑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 하지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오리무중이다. 카이로스와 마법사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할수록 가슴이 무거워지고 조바심 이 났다. 생각을 멈추고 일단 좀 쉬어야겠어. 

 

-

 

 잠결에 머리카락이 살짝 잡아당겨져 눈을 떴다. 알로라가 어제보다 훨씬 더 나은 안색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로라]

언니, 고마워요! 밤새 계속 내 옆에 있어줬네요. 역시 이세계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인가 봐요. 아저씨도 그렇고. 

 

잠깐, 이세계... 아저씨라니? 

 

[알로라]

응응, 언니처럼 이상한 옷을 입은 아저씨 말이에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이세계의 남자? 어쩌면...! 

 

알로라, 그 아저씨 어디서 봤어? 

 

[알로라]

으음... 그건 알로라의 비밀인데... 하지만, 언니라면 괜찮아. 

 

알로라가 얼굴을 바짝 붙이더니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알로라]

황궁에는 설린 성녀님의 수면 거울이 있어요. 성녀님이 아무도 없을 때면 수면 거울을 봐도 좋다고 해서, 종종 들여다봤거든요. 거기서 자상한 아저씨를 만났어요.  아저씨는 엄청 진절해요. 알로라가 아프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노래도 불러줬는걸요! 아저씨가 알려준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잠도 잘 와요. 

 

[나]

그 아저씨가...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 수 있어? 

 

[알로라]

음.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하얗고, 회색 옷에 초록색 스카프를 자주 하고 있었어요. 알로라는 그 아저씨가 정말 좋아요! 

 

 알로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그 아저씨는 내가 아는 사람 같단 확신이 들었다. 조나단 이사장...

 에르세르에 오기 직전 강당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 아니, 그 전에도 그는 어던지 늘 수상했었지. 내 세계가 종말을 맞던 때, 그의 평온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의혹은 한층 더 짙어졌다. 에르세르에 내 정보를 주고 채린을 희생시킨, 그리고 눈 하나 깜짝 않고서 우리 세계를 무너뜨린 그자가, 알로라가 말하는 다정한 사람일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사장은 성숙한 학자인 동시에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그런 그가 대체 왜? 어째서? 아니, 일단 그를 막는 게 우선이야! 나는 냉정을 유지하고자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나단은 알로라의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그녀를 매우 아끼고 있는 눈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알로라가 말하는 것처럼 잘해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이유나 목적이 있을 터. 서둘러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알로라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알로라]

알로라, 오늘도 거울을 통해 아저씨를 만나기로 했어요. 하지만... 

 

뭐라고? 오늘...? 아직까지도 에르세르 대륙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건가?

알로라는 배를 문지르며 울먹거렸다. 

 

[알로라]

알로라, 배가 또 아파요. 히잉... 언니, 알로라를 황궁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알로라는 아저씨를 꼭 만나고 싶어요. 오늘은 새로운 노래도 가르쳐준다고 했거든요. 

 

기회가 이렇게나 빨리 오다니! 알로라와 함께 가면 의혹의 중심에 접근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찾고 있는 해답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지.

 

-

 

 나는 알로라를 데리고 조심스레 마탑을 빠져나갔다. 알로라가 알려준 장소는 내가 익히 아는 곳이었다. 거대한 새장이 있는 의식의 방. 긴장으로 인해 심장이 뛰고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거울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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