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라진 눈보라

2024. 2. 17. 23:06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그것은 마지막 눈보라였다. 나는 예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마주보고 보니 생각보다 당신을 대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내가 예신을 상대하는 사이, 로샤와 카이로스는 착실하게 강림 마법진을 발동할 준비를 마쳤다. 

 

[나]

제물이 다 모였으니 곧 통로가 열릴 거예요. 성 밖의 사람들은 다른 세계로 전송되겠죠. 나를 겁주고 위협하면 이전처럼 고분고분 당신의 말대로 움직일 줄 알았나요? 천만에. 똑똑히 봐둬요.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당신을 저지할 거예요.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도 나와 같은 능력의 소유자잖아요? 같은 제물 신세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예신이 돌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예신]

솔직히 말하지. 내 임무는 얼음 나비를 풀어 이 대륙의 생명을 전부 흡수한 뒤 나비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네가 여기 나타나는 건 예정에 전혀 없던 일이었어.

 

[나]

나는 그럼 우연히 당신의 일을 방해하게 된 셈이로군요. 

 

나는 힐끗 로샤와 카이로스를 곁눈질했다. 에신이 뭔가 수를 쓰려 하면 지체하지 말고 마법진을 기동하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예신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내가 죽기를 각오한 것을 확인한 후로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물었다. 

 

[나]

한번 해보실래요? 이번에 누가 이길지.

 

 예신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신]

그만두자꾸나. 네가 이겼어. 

 

마법진으로부터 푸른빛 기둥이 솟구치자 예신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는 다급하게 손을 들고서 패배를 인정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우리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예신]

이제 넌 다시는 나를 보려 하지 않겠지. 원하는 대로 해주마. 

 

[나]

예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누가 당신에게 그런 임무를 준 거죠? 당신이 가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오나요? 

 

[예신]

그건 네가 알아서는 안될 일이다.

 

예신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예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 앞에서 사라져주는 것뿐. 이번 생에서 다시 널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동시에 눈보라가 멈추었다. 기적처럼 하늘이 맑아졌다. 광장을 뒤덮었던 눈과 얼음나비들도 모두 제 주인을 따라 사라졌다. 카이로스는 실버나이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마법진의 작동을 멈추었다. 로사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와락 껴안았다. 

 

[로샤]

그대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모든 일이 끝나자 긴장이 풀리며 다리의 힘도 풀렸다.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지만, 로샤가 나를 안고 버텨주었다. 해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해냈어.

 

[로샤]

모두 그대의 덕이다. 봐라. 눈이... 그쳤어. 

 

나는 로샤와 손을 맞잡고 하늘을 올려 다봤다. 

 

[로샤]

드디어 끝났구나, 드디어...

 

로샤는 눈부신 햇살 아래서 더없이 홀가분하게 웃었다. 눈과 얼음이 사라진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계만 같았다. 한 시대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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