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먹구름

2024. 2. 17. 22:52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몰려드는 얼음 나비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순간, 흩날리던 눈송이가 공중에서 한데 뭉치더니 얼음 송곳으로 변해, 일시에 땅으로 쏟아졌다. 

 

[엘리스]

얘들아, 엎드려! 

 

[나]

엘리스...? 엘리스!

 

엘리스는 바닥에 엎드린 아이들을 제 몸으로 감싼 채 보호하고 있었다. 뾰족한 얼음덩 어리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나]

안돼!!

 

 지표면엔 구멍이 생길 정도로, 공격은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온통 아수라장이었지만, 유독 내 주변만 멀쩡했다. 모든 공격은 나를 비껴갔다. 예신이 말한 대로였다. 나는 한달음에 엘리스에게로 갔다. 그를 구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엘리스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은 도망쳐버렸고, 나는 엘리스의 몸을 끌어안고서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

엘리스...

 

 그는 평소처럼 짓궂은 농담을 건네지도, 로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지도 못한 채 홀로 먼 길을 떠나버렸다. 한파는 그의 몸에 남은 마지막 온기마저 빠르게 앗아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야속했다. 나는 엘리스의 눈을 감겨주고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그를 안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호위병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예신이 말한 '절망'. 끔찍한 혼돈, 상실과 고통, 그리고 잔인한 죽음이 곳곳에 만연했지만, 새하안 눈으로 뒤덮인 사방은 소름 끼칠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분노할 시간, 비통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게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 남아 있으니까. 날카로운 얼음 공격을 피할 방도가 없는 지금, 나는 그들에게 유일무이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카이로스는 발 빠르게 대응 중이었다. 보호 마법을 걸어둔 튼튼한 마차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실어 성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알카이드를 만난 나는 일단 마차들을 무리 짓게 한 뒤 최전방으로 나섰다. 역시나 공격은 나를 피해 갔다. 마법사들이 흐트러진 얼음덩어리들을 처리했고, 마차는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

 

 어느덧 해가 졌다. 쉬지 않고 노력한 덕에 대부분의 평민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알카이드]

신녀님, 에르세르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타의로 소환되어 오셨음에도 이토록 헌신하시다니... 이제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남은 시간만큼은 두 분을 위해 사용하서야지요. 

 

 알카이드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알카이드]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겠지만, 신녀님과 폐하께서 에르세르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다니, 평범한 자들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지요. 

 

-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로샤는 팅 빈 침전을 홀로 지 카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만 있는 그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 그는 무기력하게 중얼거 렸다. 

 

[로샤]

밀리선생님께서 조금 전 떠나셨다. 엘리스의 소식도... 들었어. 그대가 마지막을 지켰다지. 이제 정말... 혼자가 됐군. 실버나이트의 말이 맞았어. 절망이 뭔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군.

 

[나]

로샤. 내가 있잖아요. 

 

나는 로샤의 손을 잡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나]

나를 봐요. 내가 여기 있어.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로샤는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내 목덜미에다 얼굴을 파묻고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가 품은 괴로움이 내게로 고스란히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로샤]

너무 추워... 이다지도 견디기 힘들 줄은 몰랐어. 그대의 온기가 필요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어 보이던 로샤의 약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

내 온기가 필요하면 얼마든 가져가요. 당신이 지금껏 내게 나누어주있던 온기는 훨씬 더 따뜻했는걸요.

 

 로샤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오히려 팔로 그의 허리를 두르고 더욱더 세게 그를 감싸 안았다. 

 

[나]

곁에 있을게요, 로샤. 끝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우리에겐 목표가 있어요.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리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댄 서로의 몸을 통해 온기와 힘을 얻었다. 짧았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로샤는 포옹을 풀고서 한 걸음 물러났다. 한 걸음 더, 물러난 그는 애틋한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로샤]

그대가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다. 황태자 아인은 들라. 

 

 로샤의 명령에 아인이 나타났다. 그는 집행인 부대 망토가 아닌, 황실 전통 예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로샤는 아인에게 자신의 사후 황위 계승 절차와 사회 안정 계획을 철저히 주지시켰다. 그는 강림 의식 이후 혼란스러울 에르세르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그는 이미 없을 텐데도 말이다. 

 

[로샤]

아직까지 황성에 남아 있는 신민들은 폭군인 내게 반발하는 자들이지.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황실 정통 계승자인 아인뿐이야. 이 시간부로 병력 지휘권과 마탑에 행사할 권리를 황태자 아인에게 이양하겠다. 아인.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데리고 가 남은 신민들을 대피시켜라. 선황의 아들인 너의 말이라면 그들은 따를 것이다. 무엇보다 황위 계승자인 아인의 안위도 중요하다. 가장 든든한 호위가 필요하겠지. 황성에서 실버나이트의 공격이 닿지 않는 유일한 곳인 그대가 필요해. 함께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아쉽지만, 오직 그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부탁이야. 아인, 그리고 내 신민들을 도와줘. 

 

나는 자신만만하게 로샤를 마주 보며 약속했다. 

 

[나]

걱정 말아요. 모두 안전히 대피시길게요.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로샤는 천천히 다가와 내 뺨을 한번 어루만지더니, 이내 귀걸이를 빼냈다. 

[로샤]

미안했다. 이런 감시용 물건을 아직까지... 이런 건 이제 필요 없어. 

 

그는 근처의 테이블로 가 보석함을 열더니, 그 안에서 아름다운 장식품을 꺼냈다. 섬세하고도 화려한 세공의 달걀형 장식품은 황홀한 빛을 내뿜으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 혹시... 국보나 그런 거 아닌가요? 

 

[로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유품이니 내겐 국보나 마찬가지지. 젊은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청혼하려고 최고의 장인을 불러다 3년간 공들여 만들었다고 해. 이젠 그대가 받아줘.

 

[나]

그, 그런 귀한 걸 받을 순 없어요! 

 

[로샤]

그런 이유로 사양해선 안 돼. 귀한 걸 주는 내 마음이 뭐가 되나. 서둘러. 시간이 없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로샤의 선물을 받아 들고서 아인과 함께 황궁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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