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 맹세

2024. 2. 17. 23:10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눈이 정말로 그쳤다. 예신은 약속을 지켰다. 얼음 나비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고, 봄이 돌아왔다. 

 

-

 

 1년이 지난 밤, 나는 로샤의 손을 잡고 별궁의 정원을 거닐었다. 일음 나비와 눈보라는 어느새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얼음 나비가 사라지고 난 뒤, 무슨 일인지 마탑의 마법사들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카이로스는 죽기 전 마탐을 봉쇄했다. 진실도 마탑과 함께 봉인됐다. 

 

[로샤]

눈이 그치고 봄이 왔어. 그대도 내 곁에 있고 말이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밀리 선생님과 엘리스, 카이로스 그리고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남몰래 괴로워했다. 

 

실버나이트와 눈보라는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깊은 상처는 흉터를 남기는 법.

 

 로샤는 아인에게 황위를 넘기고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아인은 통치에는 관심이 없다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끌고 아예 황성을 떠나버렸다. 선황이 어떤 자였고 어떤 문제가 있었든, 아인으로선 로샤가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황궁 역시 그에게 있어 편하지 않았겠지. 

 재앙은 사라졌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다. 실버나이트를 따르던 유랑민과 반란군들은 여전히 골치였다. 사회 곳곳에 채 낫지 못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로사와 함께 그런 문제들을 처리 하느라 늘 바빴다.

 하지만 문득문득 예신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생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죽고 난 후엔? 그때는 또다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걸까? 불안해졌다. 로샤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평소처럼 아주 뜨거웠다.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봄이 왔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두자. 

 

-

 

 날이 따뜻해지니 더 분주해졌다. 로샤는 근면한 황제로 돌아가 매일 정사를 처리하고 대륙 각지의 부흥에 힘을 쏟았다. 나는 로샤의 곁에서 그를 도왔다. 세상을 구한 신녀에서 황궁의 관리로 전업한 것이다. 나는 로사에게 신녀대신 명예 기사 작위를 폐했다. 그는 나를 외한 작위 수여식까지 거행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로샤]

그대는 이제 제국의 귀족이자 관리가 됐으니,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한다. 

 

나는 매일매일 회의장과 거리 곳곳을 바쁘게 누비게 되었다. 귀족들은 나를 깍듯이 모셨다. 그러나 나는 거리의 사람들이 '친절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았다. 로샤는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빴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냈고, 모자란 잠은 회의장 한쪽의 소파에서 채웠다. 오늘은 로샤와 봄 소풍을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의장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깨외서 무슨 소풍을 간단 말인가. 

 

[하녀]

폐하.

 

[나]

깨우지 말아요, 괜찮...

 

 미처 말리기도 전, 로사는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로샤]

소풍! 소풍을 가야지! 알고 있었어! 

 

[나]

정말 괜찮아요, 안 가도 되니까 좀 더 자요. 

 

[로샤]

그건 안 되지. 모처럼 그대가 먼저 청한 데이트인데. 오늘의 프러포즈는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귀여운 신부님만 있다면, 매일 외롭게 회의장에서 잘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이야. 

 

[나]

이젠 신부라고 안부르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데이트가 아니라 봄나들이!

 

티격태격하는 건 여전했다. 로샤는 요즘 들어 나를 놀리는 데 재미라도 붙인 모양이다. 

 

[로샤]

그래그래, 조금만 기다려줘. 바로 준비할 테니까.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다고. 

 

-

 

 황성 교외의 호수엔 봄꽃이 만발해 있었다. 잔잔한 호수에선 백조가 노닐고, 나뭇가지 끝에선 꾀꼬리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로샤는 저 혼자서 잔뜩 신이 나선 백조를 잡아다 선물해주겠다고 난리였다. 잠도 못 잤는데 어쩜 저렇게 힘이 넘치는지 모르겠다. 한바당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전에 그에게서 맡았던 모친의 유품을 조심스레 꺼내 돌려주었다. 

 

이거요. 당신에겐 소중한 물건이었을 텐데, 그런 걸 계속 간직하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어요. 당신이 보관하는 게...

 

[로샤]

갑자기 화가 나는걸? 

 

[나]

네?

 

[로샤]

진심이다. 그걸 돌려주려 하면 진짜 화낼 거야. 

 

로샤의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이 느끼졌다. 로샤도 얼굴을 붉힐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로샤]

우리의 시작은 보통의 남녀 관계와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랐지. 그때는 여유라곤 없었어.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그러곤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샤]

그대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 절박한 상황에서 쫓기듯이 하는 구애 말고, 제대로 예의를 갖취 정식으로 구애하고 싶어. 이걸 주었던 그날 내 마음은 이미 다 주었지만... 다시 한번 고백하마. 나는

, 저 호수의 백조처럼 일평생 오직 그대만을 바라볼 거다. 

 

로샤는 내 손을 꼭 그러쥐었다. 

 

[로샤]

그러니, 이건 그대가 가지고 있어줘.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이 장난처럼 들릴 때가 많겠지만, 그건 결코 쉽게 내뱉는 것이 아니야. 그대는 나의 유일한 상대고, 내가 걱정하는 사람이자 내 진정한 사랑이야. 

 

 로샤는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깊게 바라보았다. 멀리, 백조들이 서로 목을 기대며 털을 골라주고 있었다. 

 

[로샤]

사랑한다. 내게 그대의 반려자가 될 영광을 주겠어? 그대와 진실된 부부의 연을 맺고 싶어. 

 

 인생이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기나긴 길을 따라 걸어 나가는 것. 나는 로샤와 함께 그 길을 걷고 싶다. 그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싶다. 언젠가 자람들이 그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칠 날, 내 이름이 그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 될지는 모르지만, 부디 꽃이 만발하기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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