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막다른 상황, 소생

2024. 1. 4. 23:29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눈보라와 함께, 얼음 나비가 또다시 찾아왔다. 계속 물리쳤지만, 도무지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그때의 그 이상한 나비도 나타났다. 비정상적으로 크고 기묘하게 생긴 그것은 무리의 우두머리 같았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얼음 나비를 상대하느라 체력은 고갈 직전이었다. 지진 나머지 공격을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꼼짝없이 당하는구나 생각한 순간, 눈앞의 나비들이 전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이건...?설마!

 허공에 떠다니는 빛 무리를 발견한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알카이드]

내가 가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일어나면 꼭 해줘야지 하고 쌓아뒀 던 말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

......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만 있자 알카이드가 성큼 다가왔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품에 안은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알카이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보고 싶었어요. 

 

[나]

알카이드...! 나는... 나는...!!

 

[알카이드]

내가 혹시 괴물로 변해버릴까 봐 무서웠나요? 

 

나는 눈물을 닦고 힘껏 고개를 저은 뒤, 그의 맑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나]

알카이드는 알카이드예요. 변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어요. 

 

문득 느껴지는 옅은 향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나]

꽃잎차! 

 

[알카이드]

함께 마시려고 했다기에 우려봤어요. 제법 괜찮던데요? 

 

아니, 잠깐! 그동안 내 말이 다 들렸던 건... 아니겠지? 

 

[나]

알카이드...! 

 

알카이드는 짐짓 모른 체 시선을 피하더니 테이블로 향했다. 

 

[알카이드]

한 잔 하시겠습니까, 신녀님?

 

꿈만 같았다. 다시 이렇게 나란히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게 되다니. 

 

[나]

이제... 괜찮은 거예요? 

 

나도 모르게 알카이드의 가슴 한복판에 손을 댔다. 

 

[나]

아, 미안해요. 얼음이 다 녹았는지 걱정돼서.

 

뒤늦게 놀란 나는 손을 떼려 했지만, 그가 내 손을 낚아챘다. 알카이드의 손이 이렇게 컸던가. 나는 이내 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나]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체온을 나누고만 있었다.

 

[나]

알카이드, 어떻게 돌아온 거예요? 

 

[알카이드]

내가 마법사로 살아오며 품었던 걸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욕망이 있었거든요. 내가 당신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돌아왔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나]

믿어요. 내가 아는 모든 기적은 전부 알카이드가 만들어준 것이었으니까요. 

 

밤이 깊었다. 우리는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

알카이드, 갑자기 무리하면 안 돼요. 일찍 자요. 

 

[알카이드]

그럴게요.

 

[나]

아직도 내 손 잡고 있는데요...? 

 

[알카이드]

알고 있어요.

 

 그가 내 손을 쉽사리 놓지 못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가는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게 멈취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나는 결말을 회피하고자 에르세르로 돌아온 게 아니다. 내 곁에는 알카이드가 있다. 그러니 혼자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를 온전히 믿는 만큼, 그 역시 나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나]

알카이드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겠죠. 내 얘기, 들어볼래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알카이드]

기꺼이.

 

나는 과거에도 이렇게 당신에게 보호받았던 적이 있어요. 

 

-

 

나는 내 지난 여정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나]

...그렇게 된 거예요. 손을 쓸 수도 없었어요. 결국 '그때의 알카이드'는... 내 세계를 망치고 말았죠. 할 수 있다면 그런 결말을 바꾸고 싶었어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러 이곳까지 왔지만,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네요.

 

내가 얻은 거라곤 지금의 알카이드를 만난 것뿐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이 사람을 만난 건 가장 큰 행운이니까. 이 사람은 어떤 때라도 믿을 수 있는, 나의 알카이드.

 

[알카이드]

신기한 이야기군요. 또 다른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것도 같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싶은 사람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성을 찾기 힘들 겁니다. 마법사는 원래 불안정한 존재예요. 격한 감정은  왜곡된 욕망로 변하고 집착이 되어 모두를 불행하게 하죠.

 

그는 담담하지만 더없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알카이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말아요. 

 

알카이드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카이드]

당신이 내게 이 얘기를 해준 건, 바로 내일이 월계절이기 때문이겠죠. 내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 온 마음을 다해 지 카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당신이 고통과 비단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아요.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그걸 이루고 만족할 때까지 나는 당신을 지킬 겁니다. 

 

알카이드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알카이드]

당신의 소원은 제 별빛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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