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돌이킬 수 없는 힘

2024. 1. 4. 23:08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우리는 호레스의 회로를 차단했다. 알카이드는 마법으로 얼음 단도를 만들어 내게 건넸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날을 호레스의 등에다 붙이고 위협하자 그가 움찔했다. 

 

[나]

잔재주 부릴 생각은 마. 나는 알카이드랑은 달라서 참을성이 부족하거든.

 

[호레스]

호오, 참을성이 부족하다니, 더 마음에 드는걸? 피를 보는 것도 좋고 말이야. 

 

 그저 자극과 흥분만이 전부인 녀석이라 목숨도 아깝지 않은 모양이다. 입을 다물게 하려던 그때, 호레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뭔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들판 저편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하다 싶더니. 호레스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던 것이다. 마법사단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 었다. 카이로스의 집넘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마법사들이 모은 빛은 마침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빛들은 유성우가 되어 우리를 덮겠다. 빠져나갈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알카이드는 많이 다졌고 이미 대부분의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마법사들에게 멈춰달라고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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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2. 발버둥

 

[나]

그만, 그만둬요!!

 

그 순간, 호레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내게서 얼음 단도를 빼앗고 빙글빙글 웃었다. 

 

[호레스]

하여튼 신녀님도 참. 좀 얌전하게 굴 수는 없어? 

 

이윽고 그는 내 뒷목을 내리쳤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었다.

 

 이세계 신녀는 다시 새장에 갇혔다. 도주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수면 마법으로 재위둔 그녀를 여러 마법사들이 돌아가며 감시했다. 알카이드가 신녀와 함께 배신하고 도망친 뒤, 마탑에서 믿음직스러운 인물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마법사들이란 애초부터 불안정한 존재였다. 신녀를 잡아온 호레스는 직접 그녀를 감금하고 사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시작도 전에 카이로스에게 들켜 크게 경을 졌기 때문이다. 제 위치를 망각하고 반역을 저지른 알카이드는 마탑으로 끌려갔고, 이후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대마법사가 그를 직접 처단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확인 불가능한 이야기다.

 

"강림 의식은 예정대로 거행된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한다.”

 

 그것이 마탑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반역자 알카이드와 이세계 신녀가 대마법사의 감시를 피해 황성 밖으로 도망쳤던 건 마탑 소속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마법사들은 두려움과 부러움을 품은 채 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운명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기 직전,

그 순간만큼...

그들은 오직 그들만의 운명을 위해 발버둥 쳤던 것이다. 

 

 

>알카이드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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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알카이드를 감싸 안고서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호받은 쪽은 나였다. 알카이드가 만들어낸 반구형의 마법 장막이 우리를 둘러쌌다. 끔찍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그가 또 한 번 무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혼란 속에 평화로운 곳은 오직 이 안뿐인 듯했다. 우리는 곧 깨질 듯 위태로운 공간에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알카이드의 창백한 얼굴엔 지진 기색이 역력했다. 

 

[알카이드]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내가 약속했었죠.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많은 감정들이 스쳤다. 

 

[알카이드]

딱 한 번만... 안아짂요. 

 

마법사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지만, 알카이드는 오직 나만 바라봤다.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나]

열 번, 백 번, 수천 번이라도 안아줄게요. 

 

마주 안는 그의 몸짓에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는 숨조차 내쉴 수 없을 정도 로 나를 꽉 안았다. 

 

[나]

알카이드... 잠깐.

 

그의 가슴에 내얼굴이 파묻혀 숨막혀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쉽사리 팔을 풀지 못했다. 

 

[알카이드]

아아, 이런 기분이구나.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몰라요. 꼭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요. 눈을 뜨라고 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감고 있어줘요. 

 

[나]

알카이드, 그게 무슨...? 

 

호레스가 뭔가를 눈치챘는지, 특유의 경박함을 지운 채 펄쩍 뛰었다. 

 

[호레스]

서.... 설마! 너 미쳤어? 아무리 절박해도 그럴 필요까진...! 

 

호레스는 달리며 동료들을 항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호레스]

모두 경계 태세로! 

 

[알카이드]

저들을 포기시길 방법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호레스]

알카이드, 이 멍청한 자식! 그걸 해버리면 끝이야!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알카이드는 호레스의 말을 무시한 채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긴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알카이드]

당신에게 했던 약속, 나는 잊지 않을 거예요. 더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 하더라도... 잊지 않을게요. 절대로. 

 

더없이 이상하게 들리는 말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마법사들이 총공격을 퍼부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의 한가운데서, 알카이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알카이드]

눈 감아요. 나를 위한다면, 부디 그래줘요.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눈을 질끈 감고서 몸을 웅크렸다. 거대한 충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뭔가가 폭발한 듯 아주 강한 빛이 번쩍였다. 감은 눈조차 부실 정도로, 실로 무시무시한 빛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알카이드...? 알카이드의 말대로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눈을 뜨면 뭔가 두려운 것을 마즈하게 될 것 같아서.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이 고요해졌다. 오싹할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걸음 소리... 나를 항해 다가오는 발소리는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카이드]

착하기도 하지. 조금만 더 그렇게 있어줘요. 

 

 바람...? 부드럽고도 강한 힘에 의해 몸이 떠올랐다. 나는 알카이드의 옷자락을 꼬옥 붙잡고서 하늘을 날았다. 

 알카이드는 좀처럼 눈을 뜨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천천히 고도가 낮아지고 발이 땅에 닿았다. 

 

[알카이드]

이제 됐어요. 눈 떠도 돼요. 

 

꼭 닫고 있던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풍경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극심한 혼란을 겪은 뒤라 그런지, 다시 마주한 알카이드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알카이드]

왜 그렇게 보죠? 혹시... 제 꼴이 엉망인가요? 

 

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나]

아니에요, 왠지 알카이드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 같아서...

 

알카이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카이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부드럽게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의 눈이 여우처럼 휘어진 걸 본 것만도 같다.

 

[알카이드]

이렇게 또 한 번 안을 수 있다니. 감개무량하네요.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안전한 곳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수가 부쩍 늘어난 알카이드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반란군이 버리고 간 듯한 천막 몇 동을 발견했다. 알카이드는 그중 하나 앞에 서며 내게 들어가라 손짓했다. 

 

[알카이드]

오늘 당신과 보냈던 시간들이 내게 있어 가장 큰 보물이에요. 고마웠어요, 그럼 잘 자요. 

 

나는 돌아서는 그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 

 

[알카이드]

저기... 같이 자려는 건가요? 

 

[나]

앗! 아, 아니에요! 무슨 그런...! 

 

서둘러 돌아서는데, 알카이드가 나를 불렀다. 

 

[알카이드]

아마도... 긴 잠을 자게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깨우지 않을 테니 원없이 자라며, 나는 밝게 인사를 건넸다. 잠을 청했지만, 눈을 감으면 알카이드의 품에 안겼던 느낌만 떠올랐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는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하품보다 재채기가 먼저 나왔다. 밤새 더 추워진 것 같다. 나가서 불부터 피웠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알카이드의 천막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오가 될 때까지도 알카이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걱정스러위졌다. 

 

[나]

알카이드. 괜찮아요? 

 

대답이 없다. 천막의 입구에 손을 대던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나]

알카이드! 

 

천막의 천을 포함해 안쪽의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공기 중엔 미세한 얼음 조각들이 안개처럼 떠다녔다. 실내는 입김조차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나]

이게 대체... 무슨! 알카이드! 

 

 침대 쪽을 바라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서버리고 말았다. 조용히 누워 있는 알카이드의 피부는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머리카락과 속눈썹을 포함해 온몸이 새하안 서리로 뒤덮여 있었다. 

 내 뺨을 어루만져주던 그의 손가락에선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꼭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이 옅은 푸른빛과 끔찍한 냉기를 나는 알고 있다. 이건 바로 얼음 나비의 날개... 마법사가 얼음 나비를 처치할 수 있어도 절멸시카지는 못하는 이유. 마법과 얼음 나비가 같은 기원을 두고 있어서가 아닐까...

 지난 여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들어온 '마법사의 원죄'란, 어쩌면 이걸 가리키는 걸지도 모른다. 얼음 나비와 맞서기 위해선 그것과 동등한 힘을 지녀야만 하겠지. 그러니, 마법사들은 얼음 나비로 변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힘을 갈구했던 거다. 알카이드는 그 힘을 가졌다. 그래서 늘 짊어지고,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는지도 모른다. 알카이드뿐 아니라 그의 동료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호레스가 왜 그렇게 삐딱한 시각을 갖게 됐는지도 이해가 갔다.

 이 지독한 운명의 고리는 도대체 어디서 시작됐고 어떻게 끊을 수 있는 걸까. 망연자실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

알카이드... 대체 어째서...

 

그는 차갑게 얼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끔찍한 냉기를 아랑곳 않고서,

나는 그에게 키스했다. 동화처럼 이 카스가 그를 잠에서 깨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입을 맞췄다.

 

[나]

알카이드, 일어나요... 늦잠은 그만두고 제발 일어나요... 어서 일어나... 흐흑! 

 

 알카이드에겐 내가 있다.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으며, 전처럼 무기력하게 운명에 끌 려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뜨거운 내 눈물은 그의 뺨 위로 떨어져 꽁꽁 얼어붙어버렸다. 참담한 현실에 몸서리치던 순간, 무언가가 날아와 천막에 마구 부딪쳤다. 얼음 나비...! 얼음 나비들은 금방이라도 알카이드를 집 어삼기려 했다. 어딜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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