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실버나이트

2024. 2. 12. 12:51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세상에... 뭐야, 나 늦잠 잔 거야? 아무래도 독한 술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상황에 팔자 좋게 늦잠이라니, 말도 안 된다. 로샤가 얼마나 비웃을까. 정말 한심해. 한숨을 푹 쉬고서 옷을 갖추고 휘장을 걷었다. 그런데...어라? 로샤 역시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 우아하게 자는 모습이 역시 귀족은 다르구나 싶었다. 그러나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 안쓰럽게도 느껴졌다. 

 더 자게 두고는 싶지만, 황제의 늦잠은 여러모로 곤란하겠지. 정중히 깨워야겠어. 나는 숨을 죽이고서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로샤]

누구냐!

[나]

아, 미안해요. 일어날 시간이 지난 것 같아서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무시무시한 검이 똑바로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내, 로샤의 몽롱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검을 거두어 넣으며 즉시 사과했다. 

 

[로샤]

아니, 미안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사과하지. 자객인 줄 알았다. 일어났을 때 누가 있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샤는 내가 간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아마 그는 긴 세월 동안 숙면을 취한 적이 없을 것이다. 자는 모습이 왜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 이제 알겠다. 

 

[로샤]

이렇게 귀여운 자객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인데 말이야. 그나저나... 오래도 잤군. 

 

[나]

더 일찍 깨웠어야 했나요? 

 

[로샤]

뭐, 하루쯤은 괜찮겠지. 근면성실의 화신인 대마법사가 해 뜨기도 전에 깨우러 와 일거리를 던져주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그런데 카이로스가 오늘은 웬일로 아직이지? 하긴. 신혼 첫날밤이었으니까. 융통성은 없어도 눈치는 있나 보군. 가만... 이거 잘만 이용하면 괜찮겠는데? 폭군이 주색에 미쳐 매일매일 늦잠을 자는 거다! 

 

 황제의 꿈은 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마음껏 자는 것 뿐인건가... 뭔가 안쓰러웠다.

 

[로샤]

더 늦기 전에 아침식사를 대령하라 해야겠군. 

 

[나]

대령하라니... 여기서 식사하게요? 

 

[로샤]

그래. 내가 신부를 탐하느라 침전에서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은 실버나이트를 자극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장치일 테니까. 

 

[나]

그게 과연 먹힐까요? 

 

로샤는 예신과 실버나이트가 동일 인물이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샤]

애초 그대가 실버나이트를 찾아 그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면, 지금 그대는 여기에 없겠지. 

 

[나]

......

 

[로샤]

그간의 시공 여행을 통해 그대는 이 대륙의 과거와 미래까지 접했을 거야. 그렇다면 혹시 내가 수면 거울을 통해 그대를 지켜본 것도 알고 있나? 

 

아, 맞아! 그걸 잊고 있었네!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고 수치스러웠던지! 

 

[나]

제가 사는 세계에서 동의 없이 엿보는 건 죄예요! 범법행위라고요! 

 

[로샤]

이 나라에서는 짐이 곧 법이라 하지 않았느냐. 

 

[나]

무논리에는 당할 수가 없네요...

 

[로샤]

잡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대를 관찰하며 알아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대는 예신이라는 그자에게 맡겨져 온전히 그를 믿고 따르며 의지했지. 어쩌면 그에게 연심을 품은 적도 있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예신이 그대를 대하는 태도는 그대와는 전혀 달랐다.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 의지할 수 있는 오빠, 심지어 연인의 역할까지... 그자는 그대의 정서적 요구에 맞춰 너무도 다양한 역할을, 아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긴 세월 동안 능숙하게 역할을 바뀌가며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것 말이야. 아마 그대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조금은 느끼고 있었을 거다. 나더러 연인이 아니라 아버지 연기를 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로샤의 말이 맞다. 나도 어렴풋이 의심은 하고 있었으니까. 

 

[로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예신이 그대에게 있어 그토록 완벽한 상대가 되어준 까닭은 무엇일까. 그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때문에? 천만에. 그건 일반인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그자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야. 그자는 그대에게 줄곧 뭔가를 숨겨왔어. 그리고 아마도...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접근했을 기다. 어쩌면 그대의 능력과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겠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샤는 아주 깊은 곳까지 날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신은... 정말 실버나이트일까. 로샤의 생각대로, 그가 나를 보살피는 건 그저 연기일 뿐이었을까. 감상에 젖는 건 뒤로 미루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세계의 일이니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로사의 말을 기다렸다. 

 

[로샤]

과연 의연하군. 칭찬해주지. 사람의 약한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자신을 믿고 따르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그자의 수법이다. 고결한 기사의 모습을 통해 약한 자들을 미혹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음모를 대신 실현하도록 조종하는 것이지. 함께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예신, 아니 실버나이트와의 인연을 끊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냉철해져야 한다. 그래야 나도 그대를 믿고 협조할 수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실버나이트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순 없다. 그자의 첩자는 도처에 깔려 있어. 황궁뿐 아니라 카이로스의 마탑에도. 물론 이 작전이 유치하게도 느껴지겠지. 하지만, 실버나이트가 제 발로 나타나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이든 시도해볼 가지가 있다. 

 

[나]

맞아요. 

 

표면상으로 나는 지금 로샤의 총애받는 신부. 강림 의식의 제물이자 시공초월 능력을 가진 내가 온전히 로샤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건 그쪽에게 있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실버나이트, 아니... 예신은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실패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겠지. 다만... 정말로 실버나이트와 예신이 동일 인물이라면, 나는 지금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로샤는 내 어깨를 다독였다. 

 

[로샤]

괴로워 마라. 그대는 내가 시키는 대로 호색한 폭군에게 총에받는 황후를 연기하는 것뿐이니까.

 

>뭐, 실제로는 네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아, 혹시 진짜가 아니라 연기하는 게 괴로운 건가? 솔직히 말해도 돼. 나는 언제든 온몸으로 그대를 총에해줄 준비가 돼 있으니까. 

 

 로샤의 짓궂은 장난에 웃음이 터졌다. 때마침, 노크가 울리더니 시종이 아침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로샤는 얼른 나를 끌어안는 척을 하고선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나도 그에 응하는 연기를 시종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시종이 보지 않는 사이 살짝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우리 동맹에 대한 위로였다.

 

-

 

 나는 로샤의 침전에서 하루를 보냈다. 로샤는 내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서인지 내게 에르세르 대륙의 역사를 다룬 책 한무더기를 가져와  '황후 교재' 라고 불렀다.

 나는 지루하게 책을 뒤지던 중, 얼음 나비의 기록을 발견했다. 얼음 나비는 북쪽에서 처음 발생해 각지로 퍼져갔고, 선황 재위 시절엔 마침내 전 대륙을 뒤덮었다고 한다. 얼음 나비 최초 발생지를 조사하는데, 당시 북부 지역을 통치했다던 스나이트 성의 문양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은 로샤의 옷깃을 빤히 바라봤다. 

 

[로샤]

굉장한 눈썰미로군. 그걸 그렇게나 금방 알아보다니. 선친께서는 스나이트의 성주셨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어. 얼음 나비가 우리 성을 집어삼킨 뒤, 홀로 남은 나를 선황이신 숙부께서 거둬주셨지.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얼음 나비가 스나이트성을 집어삼켰다는 건, 로샤의 부모님도...

 

[로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요즘 에르세르에는 고아가 드물지 않아. 황족으로서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도... 황족의 책임이겠지.

 

로샤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과거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듯 몽롱했다. 나는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 다시 책에 집중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들어보니... 로샤는 턱을 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시 책에서 고개를 들자,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이 꽤나 안심됐는지, 그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저녁까지 단잠을 잤다.

 해가 진 후에야 일어난 로샤는 이전까진 본 적 없던 나른하고 무방비한 모습으로 말했다. 

 

[로샤]

하여튼 그대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나쁜 소리 같진 않았다. 

 

[로샤]

이렇게 경계를 풀고 자본 게 얼마 만인지. 고맙다.

 

 황제의 침전에서 맞는 두 번째 밤. 우리는 함께 호화로운 저녁을 먹고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었다. 가끔 능글능글 나를 놀려먹기는 했어도, 로샤는 내게 철저히 예의를 지켰다. 불쾌한 언동이나 희롱은 없었다. 참으로 대단한 호색한, 둘도 없는 폭군이다. 이런 방법이 정말 통할까. 실버나이트는 과연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로샤가 휘장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 나 역시도 든든했나보다. 아주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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