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R] 청구월원 1화. 소문

2025. 6. 2. 00:10이벤트 스토리-2022/여경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소년을 처음 보았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오랫동안 인적 없는 들판을 혼자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입안에는 형언하기 힘든 쓴맛이 맴돌았고, 코 아래엔 언제나 벌레 같은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손을 뻗어 쫓아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마치 본능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동물로 퇴화해버린 듯했다. 황야를 떠돌며 먹을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었고, 눈에 띄는 것들은 무엇이든 입에 넣었다. 파충류, 풀뿌리…… 혀가 뾰족한 가시에 베어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차 주변 환경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운이 좋게도, 나를 집어삼킬 야수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조차, 나 같은 존재는 맛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광막한 황야에서는 사람, 마신, 짐승이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서로 충돌하지 않는 한, 그럭저럭 평화롭게 공존한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장면과 마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노인들은 말하곤 했다. 밤에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구미호를 마주칠 수 있다고. 그 존재의 눈을 한 번이라도 마주치면, 혼이 빨려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외를 걷게 된다면, 반드시 발 아래만 바라보고 절대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구미호와 눈이 마주친 자는 결코 그 존재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지……

 

노인의 말은 아이들의 비명 속에 묻혀버렸다. 불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겁에 질려 귀를 막았다. 마치 그 매혹적인 존재가 곧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누군가를 낚아챌 것처럼. 오직 나만이 눈을 크게 뜨고, 그 말 속의 무언가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이 떠난 후, 나는 몰래 남았다.

 

[로지타]

그 존재는…… 어떤 모습인가요?

 

늘 말수가 적었던 나였기에, 내 기이한 반응에 노인은 놀란 듯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구미호의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단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본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그 존재가 누구인지.

 

[로지타]

그 존재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나요?

 

노인은 땅에 침을 뱉었다. 내가 무례한 말을 한 것처럼 느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이수들 중에서도 구미호는 드물게 온화한 성정을 지녔다. 덕망도 높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만약 나타난다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단다. 그래서 하늘이 분노할 때면, 사람들은 구미호를 부르기 위해 좋은 공물을 아끼지 않고 바치기도 한단다.

 

기억 속에서, 노인은 이 말을 하며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로지타, 어제 무녀님이 널 부르셨다고 하던데?

 

[로지타]

네.

 

나는 대충 대답하며, 머릿속으로 그 신비한 존재의 얼굴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어떤 눈썹, 어떤 눈이어야, 그 존재를 본 자들이 다시는 도망칠 수 없을까? 아니면, 그들을 머물게 만든 건 순전히 그들 스스로의 의지였던 걸까?

 

그 후에도 노인은 가뭄을 부르는 용, 홍수를 부르는 장우 같은 괴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줄곧 구미호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로지타]

그 존재는 밤에만 활동하나요?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

꼭 그렇진 않단다. 낮에 사람들이 그 존재를 못 보는 건, 그 시간엔 몸은 깨어 있어도 마음은 굳어 있거든. 밤이 되면 외로움이나 욕망 같은 게 커지지…… 그런 것들이 그들을 불러들이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바람만이, 구미호를 멈춰 세울 수 있단다.

 

[로지타]

그 존재를 본 사람들은요? 그 후엔 어떻게 됐나요?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 조용한 마을에서 괴이한 존재에 그토록 집착하는 아이는,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인지.

 

[??]

로지타는 괴물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아. 우리 엄마가 말했어. 쟤는 재앙이래. 언젠가는 마을에 큰 화를 부를 거라고. 무녀님이 쟤를 황야에 버려야 해! 괴물한테 잡아먹히게 하는 게 제일이야!

 

누군가가 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나는 일어나 먼지를 털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걸어갔다.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을의 노인이 들판에서 주워온 아이였다는 걸. 그토록 어린 아기는, 누군가 다가오자 잠시 울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자라면서, 감각이 태생적으로 둔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어긋났다. 웃고 싶었지만 차갑게 보였고, 슬플 때조차 떼쓰는 걸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 애, 혹시 괴물 아니야?”

 

[로지타]

나는 괴물이 아니에요……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뿐이에요.

 

어린 나는 스스로를 변호해보려 했지만, 사람들 곁에 다가갈 때마다 이마에 돌이 날아들었다. 피가 줄줄 흘렀다. 표현하려 애쓸수록 오해만 쌓였다.

 

결국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게 되었고, 철가면처럼 굳은 얼굴이 나의 방어막이 되었다. 나는, 따돌림과 고립, 버림받음이 내 운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구미호의 전설을 들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일어났다. 나는 구미호에 대한 모든 단어를 필터링하고 곱씹었다. 그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피와 섞였다.

 

그 불가사의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란 감각을 느꼈다. 나는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건, 결코 변하지 않는 무언가라는 걸.

 

물론, 이건 비밀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 시절 놀던 아이들의 얼굴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오직 그때 마음속에 조심스레 그려낸 존재만은, 시간이 흘러도 시들지 않고 점점 또렷해졌다. 생기를 품고 더욱 뚜렷해졌다.

 

-

 

그날 밤, 어둠은 깊고도 무거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수의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눈을 감았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배고픔이 위장을 조여오며 허전함을 유발했다.

 

나는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더듬으며, 깊이도 알 수 없이 걸었다.

 

머릿속의 미약한 소리가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 몸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부름을 따르듯 멈추지 않았다. 나는 말라버린 강을 건너고, 황폐한 논을 지나, 돌이 가득한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그 산의 반대편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을 끄는 듯한 끔찍한 마찰음을 들었다. 그 순간,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고, 나는 완전히 내 몸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옅은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의 얼굴도.

 

노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존재가 ‘그분’이라는 것을.

 

그 존재는 허리를 약간 굽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시커먼 육체의 일부가 놓여 있었다!

 

[로지타]

……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분이 손을 놓는 순간, 생명을 잃은 육체는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툭 쓰러졌고, ‘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그리고 이 모순된 생명체를 말이다.

 

그분의 동작에 따라, 그 뒤로 끌리던 거대한 꼬리 또한 함께 흔들렸다. 밤속에서 타오르는 몇 줄기 순백의 불꽃처럼, 그것은 스스로 타오르며 생명의 정기를 모아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기이한 장면 속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곧 그 짧은 주저함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 초록빛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고개를 숙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그분을 제대로 본 순간, 그분 또한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한 미소와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로지타]

……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눈앞의 그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해온 ‘그분’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토록 사악하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웠다.

 

구미호의 모습은 소년이었다. 본능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빌어라. 살려달라고 해. 심지어 나를 통째로 먹는다고 해도, 별로 살도 없지 않나.

 

하지만 내 입에서는 이유 모를 액체가 차올랐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꿀꺽 삼키는 행동을 했다. ‘꿀꺽’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울려 퍼졌고, 나조차 놀라움에 몸을 움찔했다.

 

[소년]

왜? 날 먹고 싶어?

 

소년의 목소리는 물결처럼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게는 없었지만, 온몸이 저절로 떨릴 정도였다. 그는 발치에 쓰러진 사냥감을 떠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바로 앞까지 와도, 나는 그의 발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소년]

원해? 아니면 원하지 않아?

 

그가 말할 때, 피 냄새 같은 것은 전혀 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먼지투성이인 내 앞에 서 있는 그는 너무나도 청결해 보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다시 흔들었다. 그의 미소는 더욱 뚜렷해졌다.

 

[소년]

널 살려줄 수도 있어. 하지만 오늘 밤 본 건 모두 비밀로 해줘. 알겠지?

 

그는 마치 동등한 입장에서 나와 협상을 하듯 말했다. 그 말투에는 위협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사람과 말을 하려니, 내 목은 녹이 슨 듯했지만, 한참을 더듬고 나서야 간신히 말했다.

 

[로지타]

……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되물었다. 이제 가도 되나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년]

생각해봤는데, 가장 안전한 방법은 널 내 곁에 두는 거야.

 

나는 인정해야 했다. 그가 그 제안을 꺼냈을 때, 싫거나 무서운 감정보다도 먼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내가 그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로지타]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들었어요.

 

이 긴 밤 속,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말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죽은 시체를 가리켰다. 두 눈을 뜬 채, 허망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로지타]

그럼, 이 사람은요?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우의 눈동자는 참 아름다웠다. 모든 걸 잊게 만들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소년]

로지타, 네가 기억하는 이 일들은,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야.

 

나는 훗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날, 처음 만난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소년은 자기 이름을 ‘알카이드’라고 소개했다. 한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구미호였다고 했다.

 

[알카이드]

주의해. 한때였어.

 

그는 그 말을 할 때 일부러 힘을 줘 강조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여우란 사람의 마음을 홀리고, 유혹당한 자를 납치해 고기를 먹는다고.

 

[알카이드]

그러니까…

 

한때 신으로 떠받들렸던 구미호는, 지금은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알카이드]

네가 몰래 도망치려 하면, 난 주저 없이 널 먹을 거야.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히 보았다. 그 말과 함께 알카이드의 꼬리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부드럽고, 복슬복슬하고…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오를 것처럼.

그는 그런 날을 상상하며 기뻐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저도 모르게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하자, 나는 순간 도망에 관련된 모든 생각을 버리고 얌전히 그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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