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4. 00:30ㆍ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마침내 사방이 잠잡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울창한 숲이 필쳐져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 걸었다. 그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길이 하나 나타났다. 구불구불 휘어진 그 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감이 들었다. 이 길의 끝에 내가 찾는 것이 있을 거란, 강한 예감.
커다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이는... 그 아래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로 사락사락, 단풍잎 한 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의 머리에서 단풍잎을 떼어주고서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카이로스는 드디어 눈을 뜨고서 나를 마주 보았다. 내가 떨리는 손으로 단풍잎을 건네주자, 그 의미를 알아챈 카이로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
반드시 찾겠다고, 당신을 다시 만나러 갈 거라고 했죠? 살아남겠다는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는지 그 눈과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카이로스]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만나고도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적은 있지만... 설마 너였을 줄이아.
[나]
실망했어요? 기대하던 영웅이 아니라?
[카이로스]
전혀. 그간 너를 험하게 대했던 게 미안할 뿐.
아득한 시공을 넘어 이 단풍나무 아래,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마주봤다. 혼란스러운 건 카이로스만이 아니다. 지난 모든 여정에서 내가 가장 기피했던 이가 바로 카이로스였으니.
이번 여정에서도 카이로스는 내게 곁을 주거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랬는데... 대체 어떤 인과를 통해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운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겠지.
[카이로스]
또다시 너의 도움을 받게 됐구나.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카이로스]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을 마무리 해야겠지.
카이로스는 하늘 너머, 광활한 별의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로스]
에르세르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시공을 이동할 수 있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카이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로스]
줄곧 네 도움을 받았었는데 또 요구하다니. 너무 염치가 없나.
나는 고개를 세자게 짓고서 카이로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
무슨 소리예요, 카이로스. 나는 카이로스를...
더는 이을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카이로스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나와 그는 큰 고통, 그리고 막중한 책임들을 각자 짊어지고 있었다. 그간 시답잖은 수다나 다정한 말 한마디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눈을 감고서 그와 단단히 손깍지를 꼈다.
이윽고, 나는 카이로스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별의 바다를 유영했다. 시공의 틈에서 길을 가늠하고, 두 세계의 경계를 건드리지 않도록 안전하게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르세르에 도달했다. 카이로스는 소중히 품고 있던 알로라의 작은 시신을 그녀의 고향이자 안식처인 에르세르로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카이로스는 아직 할 일이 남은 듯 계속해서 날아갔다. 한껏 날개를 필진 그가 에르세르 대륙의 하늘을 선회했다. 잠시 후, 고요했던 대륙의 상공으로 끔찍히도 많은 얼음 나비 떼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고요했던 대륙의 상공으로 끔찍히도 많은 얼음 나비 떼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이로스의 나비는 충격에 이따금 파르르 몸을 떨기만 할 뿐, 조용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륙의 얼음 나비를 모두 흡수해 제 안에 가두려는 건가? 카이로스는 끝내 그의 목표를, 나와의 약속을 완수하려 한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나는 갈등과 절망에 몸부림치며 오열하고 말았다. 모두를 지키고 그들의 행복한 봄날을 되돌리기 위해, 카이로스는 기꺼이 제 전부를 내던지려 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끝이다. 떠날 시간이야.
[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는 거예요?
대답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다. 나는 급기야 그의 소맷자락에 매달렸다. 이대로 그를 놓아줄 수 없다. 보낼 수 없었다.
[나]
대체 어딜 간다는 거예요...!
[카이로스]
나를 시공의 균열로 데려다줘.
시공의 균열. 별들이 소멸하는 곳.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 시작도 끝도,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카이로스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의 의식이 소실되면 얼음 나비는 제멋대로 날아다니며 여러 세계의 경계를 들이받겠지. 에르세르는 물론 다른 세계들까지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스스로를 버 리는 길을.
카이로스를 만날 때마다 줄기차게 살아가라고 강요했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다. 그가 살아만 있으면 운명을 바꾸고 미래를 누릴 거라 생각했다. 평생 모르고 살았다던 행복도 끝내는 거머쥐리라 믿었다. 뭐가 도움이고 뭐가 구원이란 말인가. 나는 그를 구한 게 아니었다. 시공의 균열에는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던 그는 이제 죽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버려져 있어야만 한다. 영원히 홀로.
나는 카이로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한참이나 울었다. 카이로스는 내 어깨를 감싸고 부드럽게 토닥여준 뒤 조심스레 나를 밀어냈다.
[카이로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지만... 이제 정말 가야 해. 시공의 균열 근처까지만 안내해주면 된다. 너는 절대 가까이 가선 안 돼. 두렵겠지만, 부탁해.
아니, 그런 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것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단 하나, 그를 잃는 것을 제외하고.
[카이로스]
마지막 길을 동행해줘서 고맙다.
눈물로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카이로스]
가자. 시공의 균열까지 꽤 오랫동안 여러 세계의 경계를 지나야 하지만, 네 세계의 시간에 영향을 주진 않을 거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시간은 내게도 귀하니까.
이어, 카이로스는 내 손을 꼭 잡고서 덧붙였다.
[카이로스]
넌 내게 삶의 의미를 선사한 첫 사람이자 유일한 사람이야. 세상은 넓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내 좁은 세상엔 오직...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너뿐이었다. 잊지 않으마. 영원히.
-
기나긴 여정이었다. 카이로스의 나비는 별무리 사이를 날아 시공의 균열을 항해 나아갔다. 멈취진 우주에서 나와 카이로스의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단풍나무 아래에서 쉬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더없이 소중한 한때였다. 카이로스는 로샤와 함께 거울을 통해 지켜보았던 내 일상을 제법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잠깐! 설마 내가 옷 갈아입는 모습까지 훔쳐본 건 아니겠죠!
[카이로스]
우릴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로샤도 나도 예의와 지성을 갖췄다고.
[나]
아하. 점잖은 분들은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도 모자라 멋대로 납치까지 하고그러는군요. 심지어 어느 점잖은 분께선 나를 닭장에다 가두기도 했는데!
[카이로스]
그 일들은 정말 미안하다.정정하지.나는 음흉하고 점잖지 못한놈이야. 그런데 닭장은 너무하군. 나름 공들여 꾸몄는데.
카이로스와의 대화는 줄곧 편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예전의 우리 관계를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 었다. 나는 그간 카이로스에게 쌓였던 불만을 조목조목 따졌고, 그는 매번 정중히 사과했다. 그렇게 해묵은 감정을 털어낸 후엔, 서로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이로스는 현실 세계의 문물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카이로스]
말이 끄는 것도,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빠르게 달리는 마차라니.흥미로운데?
문제는, 내 이과적 지식이 카이로스를 이해시길 수 있을 정도로 깊지 못하다는데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자동차가 움직 이는 원리를 끝내 설명해주지 못했다. 이미 화석연료의 생성 단계에서 포기해버렸다. 카이로스는 무식한데 보탸준것 있나며 되레 버럭 성을 내는 나를보며 한참이나 웃었다. 그는 감정 없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저 세월과 운명에 치여 잊고 살았을 뿐, 그 역시도 회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카이로스도 내가 몰랐던 그의 이야기들을 잔뜩 해주었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이야것거리가 끝도 없었다. 현상금 사냥꾼 시절, 전설 속 용의 뼈와 신비한 물고기 떼를 추적했던 모험담은 나를 위해 지어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 했다.
마탑에서 야심차게 필쳐낸 책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책은 무려... 〈에르세르의 괴생물도감〉이라나?!
마법 연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세상 쓸모없는 기술들'이야말로 압관이었다. 고양이가 개처럼 짖게 하는 주술, 주량을 크게 늘려주는 마법약, 오랫동안 딱 한 가지 표정만 짓게 하는 마법 등. 혹시 그 표정 마법을 본인한테 걸어본 적이 있나는 내 질문에 그는 끝내 침묵했다…
잠도 참아가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시공의 균열은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목적지는 마침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단풍나무 아래 누운 우리는 말없이 별의 바다를 떠다니는 우주의 거품을 바라봤다. 무수히 많은 거품들 중에는 사람의 일생이 담겨 있는 것들도 있었다. 저 거품을 통해 누군가의 미래도 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별의 바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힘들게 정신을 집중한 끝에 수많은 거품 중 카이로스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카이로스의 과거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나무에 기대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카이로스가 보였다. 그는 무릎 위로 기어오르는 다람쥐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듯 숨까지 참고 있었다.
황궁의 낚시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귀족들이 잡아 한쪽에 모아둔 물고기들을 슬그머니 마법으로 숨긴 뒤 몰래 강에다 풀어주었다. 잔잔한 그의 일상을 보고 있자니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하다. 지금껏 보이지 않는 곳에 묻혀 있던 '진짜 카이로스'의 모습. 그러나. 별의 바다를 날아가는 나비의 뒷모습을 끝으로, 더는 아무런 장면도 이어지질 않았다. 가만히 숨죽이고서 기다려보았지만, 오직 어둠뿐이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미래. 다른 이들의 거품은 온통 총천연색으로 물들어가는데, 카이로스의 것만은 암흑에 잠겨있다.
[카이로스]
울지 마라. 눈물 흘릴 일이 아니야.
담담하기만 한 카이로스 때문에 더 큰 울음이 터져나왔다.
[카이로스]
너와 함께했던 잠깐의 추억을 곱씹으며, 나는 영원히 즐거울 거다.
카이로스는 살며시 내 눈을 가렸다. 더는 별의 바다를 보지 말라며, 나직이 속삭였다.
[카이로스]
나는 괜찮아. 내 모든 선택은 진심이다. 그러니 나 때문에 슬퍼하거나 괴로워 마라. 네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던 말, 기억하지? 언제든, 어디서든... 네가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다.
카이로스는 별의 거품에서 내 미래를 봤다고 했다. 내 능력을 열정적으로 펼치고 살면서 또 다른 세상을 구하고, 그리고 누군가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 뒤 행복하게 살아가는...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를 하며, 그는 나를 달래주었다.
[카이로스]
내가 본 너의 미래는 눈부시게 찬란했다. 나는... 그거면 돼.
카이로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카이로스]
때가 됐군.
카이로스는 두 손으로 나의 뺨을 감쌌다. , 이상한 예감에 저항할 새도 없이, 나는 그의 마법에 걸려들고 말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마력에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이로스]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나를 따라 균열로 떨어진 네 또 다른 미래를 봤거든. 그건, 안 되는 일이야.
[나]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카이로스만 보낼 순 없다. 내가 그의 곁에 있어줘야 해.
[카이로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지. 미치도록.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카이로스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흘러도 흘러도 계속해서 고이는 눈물 때문에 전혀 보이질 않았다. 카이로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나 나를 속박하는 그의 마력은 한층 더 강해질 뿐이었다.
[카이로스]
날 잊어야 해. 미련은 버려라. 만약 못 하겠다면... 그 녀석에게 가. 너의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카이로스에게. 거품 속에서 그를 보았다. 좋은 사람이더군. 너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미래도 봤지. 그 녀석은 평생 네 곁에 머무르며 너를 아껴줄 거야. 그 녀석에게로 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다. 너는 너의 세계로 가. 그리고 내 마지막 소원을 이뤄줘. 그건 오직 너만이 할수 있는 일이야. 나는...네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널 영원토록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강한 힘에 떠밀렸다.
어느 순간, 나는 별의 바다에 있었다. 카이로스는 이미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어져 있었다. 작별 인사처럼 날개를 펄럭이며 두어 번 선회한 나비는 곧장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광활한 우주, 별들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했다. 그는 사라졌는데.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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