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배신자

2024. 3. 7. 00:20각성의 장/용성 편 (아인)

 비행선으로 돌아온 아인은 다음 지부로 향했다. 회장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가차없었다. 그러나 그저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특정 화제에서만 냉랭하게 굴뿐, 무심한 척 경계 밖 손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곳의 아인은 내가 아는 그와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닮은 점도 있었다. 그는 마치 두꺼운 가면을 쓴 것처럼 때론 웃거나 고민하고, 위협을 하거나 화를 냈다. 아인 곁에 있는 기계소녀를 보고 있자니, 참 당혹스러웠다. 미래의 나는 나와 닮은 꼭두각시를 아인의 옆에 둔 채, 용의 도시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아인이 경계 밖 손님에게 한 일이나 용성 그룹의 허위 광고... 모든 게 너무나도 이상했다. 대체 왜? 
 
-
 
[소녀]
엄마, 나도 저런 등불 가지고 싶어요... 종이 등불은 금방 더러워지고 망가진단 말이에요. 
 
[소녀의 엄마]
저런 건 고도의 기술이란다. 저 기술을 생산해낼 수 있는 양은 매달 정해져 있지. 그러니 엄마가 내년에 사줄게. 
 
[소녀]
네...
 
 희미하게 들려오는 저 대화에, 곧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참, 그러고 보니 아인의 컴퓨터 달력에 이렇게 써 있었지...

 
패배 후 1307일 경과 
새해까지 7일 남음 

 
 패배한 날짜를 달력에 따로 표시해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새해는 원래 시스템 자체에 표기되어 있지 않나? 어째서 따로 날짜를 세고 있는 거지? 
 
[소녀]
와... 엄마, 저기 좀 봐요! 예쁜 언니가 또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아요! 
 
 도시 중앙의 스크린이 점점 밝아졌다. 소녀는 잔뜩 신이 나서 외겠지만, 아이 어머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미래의 나]
용의 도시 주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두 문명의 평화 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000입니다. 
 
[시민들]
나왔다! 저 배신자!!! 
 
 그들의 외침은 마치 가시처럼 천천히 내 뇌리에 박혔다. 스크린에 비친 소녀는 제복을 입고, 높은 곳에서 주민들을 내려다보며 발언을 이어갔다. 그녀의 뒤에는 외계의 기술이 가득했는데, 탁 트인 홀이 용의 도시와 대조됐다. 저게... 미래의 나구나. 
 
[미래의 나]
동료들을 대표해서 이번 달에도 힘써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용의 도시와 지상의 물자 교환은 양측의 문명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년]
거짓말! 이 배신자! 경계 밖 손님과 작당을 벌이는 주제에, 양측의 평화를 논해? 
 
[소년]
우리 형을 돌려줘! 형은 고글을 쓰고 난 뒤로 다시는 못 만났단 말이야! 흐흑... 
 
 스크린 속 소녀의 미소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그녀가 꼭두각시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기계적으로 또박또박 말을 내뱉는 모습에 모두가 분노했고,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미래의 나]
양측 문명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용성 그룹을 지지 해주세요. 
 
 용성 그룹을 지지해달라고 말하던 순간, 그녀의 표정에 아주 작은 변화가 떠올랐다.  
 

용성 그룹...

 한편, 거처로 돌아온 아인은 창가에 서서 스크린 속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유리에 손을 올린 채, 그렇게 계속 그 모습을 지켜봤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외침이 그에게도 닿았을까. 어쩌면 저런 말들에 이미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여성]
용성 그룹은 사람들을 속이는 허수아비 집단이야! 대제 뭘 채집하고 있는거야?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간 거냐고! 
 
[청년]
좋은 건 자기들끼리 꿀꺽했겠지! 구세주인 줄 알았는데, 인류를 위해 담화를 나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꼴을 봐, 다들 저 녀석들에게 속아 넘어가선...
 
[시민들]
거짓말쟁이! 배신자! 앞잡이! 죄인! 앞잡이 회사와 경계 밖 손님을 쓰러트리고 인류의 자유를 되찾자! 
 
[아인]
.....
 

거짓말쟁이, 배신자, 앞잡이, 죄인. 


사람들은 이러한 단어로 나와 아인을 가리켰다. 남은 이성으로 스스로를 가까스로 붙잡았지만, 회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말은 찾지 못했다. 어째서... 미래가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높은 곳에 앉아 경계 밖 손님의 일원이 되고, 용성 그룹을 지휘하며, 가면을 쓴 재 거짓 웃음을 짓는 소녀... 그것이 바로 나였다. 사람들에게 '장관님'이라 불리며, 경계 밖 손님과 '담화'를 나눈 것도... 나였다. 
 
 설마 내가 아인을 이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 건가? '인류 존망'을 들먹 이며 그를 끌어들이고, 우리 스스로 가면을 뒤집어쓴 채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건가? 우리는 그렇게 같이 변해버린 건가? 
 
[아인]
일주일 남았군. 
 
 아인이 스크린 속의 인물에게 말했다. 혼란스러운 용의 도시를 머금은 그의 붉은 눈동자는 티 없이 깨끗했다. 순간 깨달았다. 낮선 그를 보고 나서야, 그에게 있는 어떠한 것들이 그를 아인으로 만드는지 알게 됐다. 그가 인파의 끝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인]
...일주일 뒤엔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만날 거야.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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