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재회

2024. 3. 23. 15:36각성의 장/용성 편 (아인)

 과거 소년이 입은 검은색 외투에는 용 한 마리가 조용히 똬리를 들고 있었다. 잠룡물용,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아인은 그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미래의 나]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아인]

오랜만입니다, 장관님. 

 

 소녀의 새로운 모습에, 아인은 작게 동요했다. 생기를 잃어버린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띈 재 감정 없이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녀. 아인은 순간 그녀와 자신에게서 무언가 동시에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성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죽음을 항해 달리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후자여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이 가면을 쓰면서까지 원한 것은 바로 새로운 삶이 있으니까. 

 

[감시자]

'회장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간 우리가 만나던 곳은 전쟁터였지만, 이제부터는 동맹이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아인은 감시자가 경계 밖 손님 편에 선 인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경계 밖 손님은 소녀를 감시하면서도, 그녀를 통해서만 아인과 연락했다. 그렇기에 아인과 그녀, 두 사람은 감시자 앞에서 가면을 씨야 했다. 

 

[감시자]

그나저나 두분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겨우 몇 달 만에 이렇게 변한 건가요? 

 

아인은 살짝 굳어 버린 그녀의 모습을 포착했다. 아인이 입을 열었다. 

 

[아인]

서로 입장이 다르니, 각자의 이익을 위해 쓸데없는 건 자연스레 버린 것뿐입니다. 

 

[감시자]

큭큭..

 

[미래의 나]

왜 웃으시죠? 

 

[감시자]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변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소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문 채 다시 아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래의 나]

만약... 지상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으시거든, 제게 말씀해주세요. 

 

[아인]

알겠습니다. 

 

 순간 아인은 가슴 한켠이 찌르는 듯 아팠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눈과 기운이 불을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소녀가 말한 자신의 불꽃에 화상을 입은 것이리라. 

 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소녀를 보는 대신, 그녀 뒤쪽의 팅 빈 공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인]

첫 번째, 감정의 힘을 채집하는 설비의 효율이 너무 낮습니다. 이런 비효율적인 장비를 주다니... 감정의 힘이 필요한 게 맞긴 한 겁니까? 

 

[감시자]

회장님, 그 효율은 용의 도시 주민들을 생각해서 나오게 된 결말입니다. 효율을 더 높였다간, 인간의 몸이 견디지 못할 텐데요. 

 

[아인]

하지만 현재 인구수로 봤을 때, 지금 이 속도로 채집을 해서는 여러분의 요구에 맞출 수 없습니다. 

 

[미래의 나]

기준을 낮취달라는 뜻인가요? 혹시...

 

[아인]

용성 그룹에서 설비를 개조하고 싶습니다. 

 

소녀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그녀가 자신을 도우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미안해, 이건 나중에 설명할게.' 시선을 내리깐 아인은 이내 아까와 똑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감시자]

회장님,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인]

네. 물론 관련 기술은 여러분께서 공유해 주시겠죠? 자원 공유를 위한 동맹인 만큼, 자원 채집 기술을 비밀로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기술 공유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던 감시자가 이내 웃으며 답했다. 

 

[감시자]

회장님께선 큰 판을 그리시는군요. 장관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미래의 나]

...아닙니다. 

 

소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감시자]

며칠만 기다려주시면, 관련 자료를 보내드리죠. 하지만 현재 지구상에는 오직 인간만이 감정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할 겁니다. 

 

[아인]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감정이 없었으니, 경계 밖 손님들께서 지구를 불태운 거겠죠. 

 

[감시자]

그럼, 이후의 채집 상황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회장님이 앞으로 이뤄낼 성과들이 무척이나 기대되는군요. 

 

[아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인]

휴...

 

 끝났다. 저쪽에서 온 첫 번째 연락에, 아인은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잔뜩 억눌린... 충동이었다. 소녀를 보고 느낀 충동, 경계 밖 손님을 박살 내고 싶다는 충동, 자신의 결심, 그리고...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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