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2. 15:22ㆍ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처형 명령을 접한 죄인들도 합세하여 반발했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얼음 나비화 시켰다. 수많은 얼음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후원은 다시 눈보라에 휩싸였다. 끔찍한 살풍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몹시도 씁쓸하고 서글퍼졌다.
[로샤]
종종 있는 일이지. 대마법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말거라.
[카이로스]
폐하.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카이로스의 시리디시린 눈동자가 돌연 내게로 향했다. 그는 차분하고도 냉철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카이로스]
폐하도 아시다시피, 마법사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불필요한 자극은 삼가심이 좋겠습니다.
로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로샤]
아아, 그런 거였군. 이해하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짐이 감히 경의 마법사들을 데려다 여흥을 즐기는 데 이용했으니 얼마나 불쾌했겠는가. 저들은 어디까지나 마탑의 재원들이니 마땅히 존중받아야겠지. 비록 반역죄로 노역하던 중 황제에게 반항하고 예비 황후를 욕보인다 해도 말이야.
로샤의 말에 칼날이 드러나 있었지만 나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카이로스]
그런 뜻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심기가 어지러우신 모양입니다. 마탑은 어디까지나 폐하께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저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뿐이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곳의 일은 신이 마무리하겠습니다.
-
로샤와 나는 별궁 내부로 이동했다. 그때였다. 낮익은 시녀 한 명이 다가왔다. 저 여자는 수잔나...!
[수잔나]
황제 폐하, 신녀님, 무탈하셔 다행입니다!
안 돼, 이 여자가 나타났다는 건! 수잔나는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로샤를 돌아보며 소리겠다.
[나]
로샤! 저 여자를 막아야...!
미처 말을 다 맺기도 전, 수잔나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원가를 입에 물었다.
붉은 보석! 마법사들이 스스로를 얼음 나비화시카며 깨물었던 그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음 나비들이 날아오르더니 일제히 내게로 달려들었다. 로샤는 나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자신의 온몸으로 감싸 보호해주었다.
[로샤]
크윽!
[나]
로샤! 왜 이러는 거예요!
[로샤]
그대가 로샤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
[나]
지금 무슨...!
나는 발버등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로샤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로샤]
걱정 마라, 나는 강하니까. 내가 그대를 지켜줄게.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묵직하게 실리는 그의 체중을 느끼며, 나는 절망했다.
[나]
도와주세요! 폐하가 위험해요! 빨리!
[시종 1]
마법사는 얼음 나비를 상대하고 호위병들은 경비에 만전을 기하라! 어의를 불러와!
[시종 2]
신녀님께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로샤를 두고 갈 순 없다.
[나]
아니, 나는 괜찮아요. 폐하의 곁을 지키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위를 올려다본 나는 경악했다. 실버나이트와의 접촉을 바라고는 있었지만, 그게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나저나, 실버나이트가 시종으로 위장한 채 이만큼이나 침투해 있던 것을 누구도, 심지어 카이로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니. 그의 가공할 위력에 두려움이 앞섰다.
['시종?']
자, 나와 함께 가자.
내게 손을 내미는 그는 너무도... 예신 그 자체였다.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신비한 반란군 지도자 실버나이트인지, 아니면 내가 아는 예신인지 너무도 혼란스럽고 긴장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
도와...!
비명을 질러 사람들을 부르려던 순간, 거역할 수 없는 힘에 가로막혔다. 비명을 질렀어도 소용 없었을 것이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
실버나이트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별궁을 빠져나갔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분위기에 압도된 나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저 따라 걷기만 했다.
출구엔 반란군 병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핑크색 머리의 청년이 서 있었다. 정재한 선배와 똑같이 생긴 그는, 실버나이트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실버나이트는 그때까지 입고 있던 시종 복장을 벗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실버나이트]
폭군에게 감금당해 있던 신녀를 구조해 왔다. 한멜, 네가 맡아서 지켜라.
예신에다 재한 선배까지 있으니 여기가 어딘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한멜]
명을 받들겠습니다, 실버나이트 님!
한멜의 태도에선 경외심마저 엿보였다. 그는 실버나이트를 무슨 신처럼 받들고 있었다. 실버나이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실버나이트]
가자.
위압적인 분위기나 호전적인 구호 없이도 실버나이트는 무리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 실비 나이트는 나를 말에 태웠다.
[실버나이트]
폭군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줄테니, 겁먹지 마.
[한멜]
이봐, 아가씨! 실버나이트 님께서 직접 구조해주신 걸 영광으로 알라고!
실버나이트는 더없이 정중하게 나를 대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반란군에게 있어 빛의 인도자이자, 구원자였다. 전설 속 성인을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했다. 그러나... 완벽함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로샤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저들처럼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칠흑같이 깜깜한 앞길을 노려보았다.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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