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마법사의 반란

2024. 2. 12. 15:19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로샤의 사냥 실력은 놀라웠다. 그는 혼자서 사슴과 늑대 여러 마리, 심지어 곰까지 잡았다. 누구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로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로샤]
그대는 내 승리의 여신이군. 잡은 곰은 요리에 쓰기 전에... 최고의 털을 골라 짐의 신부에게 목도리를 해주는 걸 잊지 말도록.
 
[귀족 1]
폐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맹수를 잡으시다니! 
 
[귀족 2]
곰이라니, 저는 멀리서 그 그림자만 보고도 벌벌 떨다 도망쳤을 겁니다. 
 
[귀부인]
타고난 제왕의 기운 앞에 대자연마저 무릎을 꿇는군요. 
 
[귀족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귀족들의 노골적인 아침을 받으며 우리는 별궁으로 돌아갔다. 
 
-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후원에 들어선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에 파묻혔던 얼음 정원은 완벽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사방에 녹음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에르세르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에르세르도 원래는 이렇게나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곳이었구나. 그리고 로샤는 그걸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구나. 로사는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서 후원을 감상했다. 제법 오래도록 그곳에 서 있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사냥 뒤풀이가 성대하게 열렸다. 진귀한 요리들이 줄을 잇던 중 곰 염통 스튜가 나왔다. 귀족들의 끝도 없는 아첨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원래도 없던 입맛까지 달아나버렸다. 만찬 후 곧바로 무도회가 시작됐다. 로샤는 형식적으로 몇 곡 춘 뒤 내 손을 이끌고 연회장을 떠났다. 
 
[로샤]
아아, 좀 낫군. 꽉 막힌 곳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게 대체 뭐가 재미 있다는 긴지. 둘이서 오붓하게 산책이나 할까. 
 
정원을 거니는 동안, 로샤와 나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로샤]
여기는 내게 특별한 곳이지. 생명력 넘치는 이 정원을 바라보며 죽음을 이겨냈으니까. 처음 황성으로 왔을 때... 그때 나는 역병에 걸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에르세르의 역사를 떠올렸다. 얼음 나비의 재앙은 로샤의 고향인 북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폭설과 한파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혼란의 와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까지 발생했다. 
 
[로샤]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이미 얼음 나비로 큰 피해를 입었던 내 고향은 끝내 초토화됐고, 그 와중 내 어머니도... 역병으로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나를 황성으로 보내셨지. 아마도 스나이트 성은 이미 손쓸 도리가 없다는 걸 아셨을 거다.
 황성으로 향하는 동안 내게도 증상이 나타났어. 그래서 나는 황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서 홀로 머물기를 요청했다. 혹시라도 병을 옮길까 봐, 나는 하인들의 접근마저도 거부했다. 그들이 문 앞에 놓고 가는 약과 음식들로 연명하며 고열을 견더내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 그때 이 정원을 내려다보며 고통과 외로움을 달랬어. 내가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나무와 꽃들의 생명력 덕분이기도 했을 거야.
 봄을 뺏긴 뒤, 내 고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곳 황성에도 이미 몇 년째 봄이 오지 않고 있지. 이대로라면 여기도 아마...
 
 어린 나이에 마주했을,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고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로샤의 마음은 여전히 그가 나고 자랐던 북부의 동토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겨울이 지속되는 세계에 결코 미래는 없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절망뿐. 
 
[로샤]
저들에게 봄을 돌려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은 신민들만큼은 봄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할 거다. 내가 그 곳에 없더라도.
 
 지금껏 내가 본 것은 로샤의 실패와 좌절뿐이었다. 그러나, 왠지 이번은 다를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
저는 로샤가 그 곳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함께 얼음 나비의 실체를 밝히고 재앙을 막아요. 그리고 모두에게 봄을 돌려주는 거예요. 
 
로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한 걸음 다가왔다. 
 
[로샤]
행운에 의미를 두는 것은 무능한 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로샤는 몸을 낮추고 점점 더 다가왔다. 로샤의 따뜻한 숨결이 내 뺨을 간질인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로샤]
알고 있나? 그대에게서 봄의 향기가 난다는 걸. 
 
로샤는 내 손을 살며시 잡고서 손등에 천천히 카스했다. 
 
[로샤]
그대를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나는 로샤와 손을 맞잡고 오래도록 봄의 정원을 거닐었다. 기분 탓인지, 로샤는 들뜬 것처럼 보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산책하던 중,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관목 사이로 사람이 기어나오더니 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울며 호소했다. 
 
[마법사]
신녀님, 같은 여자니 당신은 저를 이해하실 겁니다. 부디 제 남편을 도와주세요, 제발... 흐혹! 
 
 오열하는 그녀의 손발엔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아직도 후원을 정리 중인 죄수 마법사인 모양이다. 그녀가 다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기괴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곳에선 한 남자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온몸이 옅은 은빛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극한의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동료 마법사 두 명이 그를 항해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지만,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보였다. 그들은 지금 저 사람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억누르고 있었다. 
 
[마법사]
신녀님! 황후 폐하! 부디 제 남편을 구해주십시오! 
 
그녀의 절박한 애원에 나는 로샤를 바라보았다. 
 
[로샤]
이미 저 상태라면 구할 도리는 없다. '처리'하는 수밖에. 
 
빛줄기가 퍼지더니 남편 마법사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해졌다. 
 
[마법사]
안 돼!
 
 그녀는 이성을 잃고서 동료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공격은 마법 장벽에 막혔다. 그사이 남자의 몸은 완전히 얼음 결정화되었고, 산산이 깨진 뒤 공중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결정들은 꼭 작은 얼음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법사]
죽었다고...? 그이가 죽어버렸어...? 
 
 동료들은 남편을 잃은 마법사를 데려가려 했지만, 그녀는 망연자실 주저앉은 재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
마법사를 키우는 것은 욕망... 그래요, 내 욕망은 모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지요. 그는 그저 가난을 피하고 싶어 마법사가 된 사람이에요. 나는 그런 그이를 따라 마탑에 들어갔고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이의 여동생이 집행인에게 처형당했고, 그이는 실버나이트 편에 서겠다고 했어요. 나는 또 한 번 그를 따라 첩자가 되었지요. 반역이 들통나고 죄수 신세가 되어서도... 우리는 함께였어요. 매일매일 몸이 가루가 되도록 노역에 시달려도, 그 사람과 함께 눈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나는 부귀 영화도, 정의도, 자유도 필요 없었어. 그 사람만 있으면 됐어. 그런데... 그런데 그이를... 너희가 뺏었어! 내 남편을... 너희가 죽였다고! 너희들이! 
 
히스테리한 울부짖음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마법사]
그이를 죽여놓고서 그가 만든 정원을 산책하며 웃고 떠들다니! 나의 피눈물로 닦은 길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두고 보자! 
 
이어서 그녀는 광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비웃었다. 
 
[마법사]
봄에 어울리는 고귀한 꽃이로군. 그런 너 또한 영원한 겨울 속에 시들고 얼어붙기를. 진흙탕에서 씩어 문드러지기를! 천년만년 저주 있기를! 
 
[로샤]

닥치거라! 

 
로샤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로샤]
그녀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이다! 집행인은 들으라!! 이 여인을, 아니 오늘 황실 별원을 청소한 모든 마법사를 참수하라!! 30분 후에 이 자들이 에르세르 대륙에서 숨쉬는 일은 없게하라! 알겠느냐!!!
 
[집행인들]
예, 폐하! 
 
[마법사]
큭큭.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좋아! 너희 모두 황천길 동무로 삼아주마! 
 
 그녀는 무언가를 입에 넣고서 깨물었다. 언뜻 붉은빛을 본 것 같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나비들로 변했다! 나비들은 즉시 나와 로샤에게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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