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치자꽃의 기억

2024. 2. 12. 15:29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반란군 주둔지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실버나이트는 차분히 연설했다. 폭군은 간악한 대마법사와 함께 어둠의 의식을 벌이기 위해 이세계에서 나를 납치해 왔다고. 그는 가엾은 자들을 반란군으로 거두어준 것처럼 이세계의 신녀 역시 구원할 것이며, 나아가 황제의 사악한 음모를 저지하고 이곳의 재앙을 끝낼 것이라고 했다. 실버나이트의 음성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는 반란군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자상한 교수님에 더 가까웠다. 

 

[한멜]

아무 걱정 마세요, 실버나이트 님. 이세계 신녀님은 저희가 잘 돌보겠습니다! 

 

[반란군 병사 1]

폭군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저희가 이분을 반드시 보호하겠습니다! 

 

[반란군 병사 2]

신녀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내게 먹을 것을 권했지만, 이런 상황에 넘어갈 리가 없다. 내가 끝내 식사를 거부하자 한멜은 나를 한쪽에 있는 천막으로 데려갔다. 

 

[한멜]

실버나이트 님께서 특별히 좋은 숙소를 내주라고 하셨다. 감사히 여기도록. 널 최대한 빨리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거라고 하셨어. 말씀하신 건 꼭 지카는 분이시니 조금만 기다려.

 

[나]

실버나이트는 어디 있죠? 

 

[한멜]

아니? 너... 설마! 실버나이트 님께 반한 건 아니겠지? 이런, 이런, 이거 곤란하게 됐는데. 굳이 어려운 사랑 말고, 나는 어때? 

 

이런 상황에도 농담을 던지는 면은 재한 선배랑 똑같네. 

 

[나]

진지하게 말하는 거에요. 실버나이트를 불러 줘요. 

 

한멜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한멜]

자리를 비우셨어. 직접 구출해 온 중요 인물을 내게 맡기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네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그분을 찾겠다며 밖을 돌아다닐 생각은 마. 도주하려는 걸로 오인받을 수도 있고, 내 입장도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하지만 안심해. 너는 곧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실버나이트 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서.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 

 

 혼자가 된 뒤, 나는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흰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동안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신은 그런 나를 위해 매일밤 치자꽃을 준비해 내 침대에 올려두있다. 예신이 준 치자꽃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면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졌었다. 꼭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침대로 가 꽃을 집어 들었다. 멀리에서도 느껴지던 진한 향기. 역시 치자꽃이다. 저 사람... 나를 알고 있어. 결코 우연일 리 없다. 그렇다면 실버나이트는... 예신과 나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예신 본인인 걸까. 

 

>고민해봐야 소용 없으니 일단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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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1. 치자꽃의 꿈

 

나는 치자꽃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잠들었다. 깊은 새벽, 실버나이트가 나타났다. 꽃을 쥔 채 잠든 소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실비나이트의 손이 빛을 발했다.

이윽고 소녀는

하안빛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에서 깨니 아주 개운했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 었다. 그리고 뭔가... 좀 이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예신은 내가 '별들의 경연'에서 사고에 휩쓸렸다고 했다. 검사 결과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기억 일부를 잃었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나. 그러나 살아가는 데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몸을 추스른 나는 학교에 나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림에 대한 흥미는 점점 사라져갔다. 황제와 실버나이트의 꿈도 더 이상 꾸지 않았다. 결국 나는 〈시공 속에서〉 연재를 중단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예신은 내게 미적 감각이 무더졌으니 그림 공부를 쉬도록 조언했다. 나는 예신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공을 바꾸었다. 취업이 잘되는 과로 변경하고 자격증 시험도 준비했다. 졸업 후 번듯한 일자리를 찾고 싶었다. 예신은 계속해서 물심양면으로 나를 지원해주었다. 그가 내 곁에 있어주는 건 정말이지, 크나큰 행운이다.

 가끔씩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몹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애써 외면했다. 뭐니 뭐니 해도 평범하게 사는 게 최고다. 

 

END.

 

 

>실버나이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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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자꽃을 멀리 치워뒀다. 마침내 실비 나이트가 나타났다. 그가 몰고 온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실버나이트]

왜 아직까지 깨어 있는 거지?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

그러게요. 늘 치자꽃 향기를 맡고서 고분고분 잠들었는데 말이죠. 예신. 맞죠? 예신과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실버나이트]

나는 '예신'이 누군지 몰라. 너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주려고 왔다. 

 

>11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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