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1. 20:48ㆍ생일/2022
개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나는 미술 과제를 서둘러 진행 중이었다.
[로지타]
군청색... 아! 군청색 물감이 다 떨어진 걸 깜빡했네!
새 물감 하나가 조용히 내 눈앞에 밀려왔다.
[로지타]
어, 선배 이건 언제 샀어요...?
[알카이드]
지난주에 누가 군청색 물감이 다 떨어졌다고 혼잣말하던데, 지금은 기억 안 나?
[로지타]
...그랬었나요?
나는 지난주에 알카이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지만. 내가 고민에 빠진 걸 보고, 알카이드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알카이드]
지난 주말 우리가 상점가에 간 이유가 뭐였는지 생각해 봐.
[로지타]
음...
그 말에 내 기억이 드디어 정리되었다. 지난 주말, 나는 알카이드를 끌고 그림 도구를 사러 상가에 갔지만, 중간에 디저트 가게의 긴 줄에 이끌려 거의 하루를 다 써버렸었다.
[로지타]
...근데 이건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알카이드]
맞아, "디저트 가게의 한정 신메뉴는 놓칠 수 없어요.”
그건 분명 내 말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로지타]
가끔은 선배가 마치 제...
나는 잠시 멈추고 적절한 비유를 떠올렸다.
[로지타]
메모리 같아요.
[알카이드]
메모…리?
알카이드는 내가 준 새로운 설정을 곱씹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카이드]
만약 내가 USB라면, 나도 종종 오류가 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내 기억엔 네 과제가 이달 말까지 마감인 걸로 되어 있는데, 왜 벌써 서두르고 있는 거야?
[로지타]
다음 주에 다른 일정이 있잖아요.
[알카이드]
응?
그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더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되돌아봤다. 공기에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번엔 정말로 내 ‘USB 선배'가 오류를 냈다는 것을. 나는 붓을 내려놓고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로지타]
선배, 다음 주말이 무슨 날인지 기억나요?
[알카이드]
그건...
드물게, 나는 알카이드의 얼굴에서 망설임과 혼란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방식을 따라 천천히 유도했다.
[로지타]
생각해 봐요. 작년 이맘때, 선배는 뭐 하고 있었어요?
[알카이드]
학기 계획 짜고, 프로젝트 관련 문헌 정리하고, 여가 시간에는 연극 동아리 공연 준비하고... 그리고...
그의 말이 멈추고, 깨달음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알카이드]
그리고 순회 공연이 끝난 후, 로지타가 준비한 생일 서프라이즈를 받았지.
나는 작년 그의 생일날, 그가 동아리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생일이란 걸 아예 잊고 있었던 거겠지. 내가 장난스럽게 놀리기도 전에, 알카이드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알카이드]
로지타 네가 함께해 준 생일조차 거의 잊어버리다니…
그는 살짝 몸을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엔 맑고 겸허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알카이드]
이 벌은 어떻게 받아야 하려나?
[로지타]
뭐, 뭐라고요...
너무 반칙이었다.
그의 방해로, 내가 하려던 말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 입술을 보며... 하려던 말은 모두 잊히고, 입안은 이상하게도 말라갔다.
[로지타]
그럼 벌로... 선배는 오늘 하루 종일 제 거예요.
나는 무심코 나의 소유욕이 가득 담긴 속마음을 드러내 버렸다. 뭔가 수습하려고 했을 때, 그의 입술이 가볍게 내 입술에 닿았다.
[알카이드]
매일이 네 거야.
알카이드의 약속을 받아낸 나는 그의 생일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지타]
장거리 여행은 시간이 조금 빠듯한데... 맛집 순회는 어때요? 근데 지금은 새로운 레스토랑이 없는데… 영화? 전시회? 너무 평범한가?
내가 낸 모든 아이디어는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로 바로 부정되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여행 정보를 보며 고민하고 있던 중, 한 통의 문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로지타]
왜 그래요, 선배?
[알카이드]
그냥 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하면 내 존재감이 좀 더 커질까 해서.
[로지타]
...
갑작스러운 그의 "시도"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 모습을 본 알카이드는 미소를 지었다.
[알카이드]
자, 그날의 계획 때문에 아직 고민 중이야?
[로지타]
네...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카이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알카이드]
로지타, 네가 내 생일 준비를 위해 애써주는 마음은 정말 고마워. 그런데 너를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건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그는 손을 뻗어, 내 손 안에 멈춰 있던 내 휴대폰 화면을 부드럽게 껐다.
[알카이드]
만약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그냥 우리가 늘 하던 대로, 계획 세우는 건 나에게 맡겨도 괜찮아?
[로지타]
선배는 이미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알카이드]
오히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라고 해야겠지. 설날 때 내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나?
알카이드처럼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은 나는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문득 떠올랐다.
[로지타]
선배가 눈꽃으로 덮인 마을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하셨고, 학장님이 자라신 곳으로 저를 데려가서 선생님들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앞부분은 발렌타인데이 때 이미 이루어졌고, 뒷부분은... 그의 과거로 더 깊이 들어간다는 의미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긴장됐다.
[로지타]
괜, 괜찮을까요...?
[알카이드]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인데.
알카이드는 나를 깊게 바라보았다. 항상 부드럽던 그의 눈빛은 이번엔 한층 더 진지했다. 뭔가를 간절히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카이드]
로지타, 나와 함께 가 줄래?
물론이다. 아니, 그보다 더 기대되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선배가 자란 곳"이라는 말만으로도 내 마음속 어딘가가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로지타]
그때의 선배는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알카이드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알카이드]
잠깐 기다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 옛날 사진을 가져오는 걸까? 아니면 카메라에 남겨 둔 영상이라도 있는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로지타]
——!
눈앞에 선 모습에 나는 말을 잃었다. 깔끔하고, 맑고, 단정한... 수많은 형용사가 떠올랐지만,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알카이드]
그때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등학교 교복을 꺼내 입었어. 하지만 몇 년이나 지났으니, 지금 대학 졸업을 앞둔 내 모습과는 조금 다르겠지... …로지타?
그의 부름에 비로소 내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레는 마음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렸다.
[로지타]
저, 저건... 뭐예요?
내 눈길을 끈 건 그의 옷깃에 빛나는 초록색이었다.
[알카이드]
응?
알카이드는 시선을 따라 내려보다가 멈칫하더니 그것을 떼어 들었다.
[알카이드]
별건 아니야. 정리하다가 그냥 달아 둔 거라...
그가 물건을 정리하기 전에 나는 그것이 뭔지 알아챘다.
[로지타]
그거... 머리핀인가요?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떠올랐다. 내 표정을 읽은 그는 단 한마디로 내 상상을 멈춰 세웠다.
[알카이드]
내 거야. 글 쓸 때 머리카락이 거슬리지 않도록 쓰던 건데, 디자인은 신경 안 썼어.
진짜 머리핀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눈길을 떨구었다.
1초, 2초, 3초...
세 번째 초가 지나자, 알카이드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알카이드]
미리 말하지만, 웃으면 안 돼.
1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귀끝이 붉어진 걸 보고 나는 자세를 곧게 했다.
[로지타]
선배, 걱정 마세요. 절대 안 웃을게요!
내 기대 어린 시선을 받은 알카이드는 천천히 머리핀으로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 순간 그의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유난히 돋보였다.
[로지타]
선배.
[알카이드]
응, 왜?
[로지타]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미인 선발 같은 거 안 했나요?
알카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카이드]
웃지 않기로 했잖아, 로지타…
[로지타]
저 정말 안 웃었어요! 진짜로요! 그저 선배가 너무 멋있어서 장난치고 싶어져서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알카이드의 방심을 틈타 장난을 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정확히 잡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알카이드]
“장난 좀 쳐볼까?”라는 건가?
[로지타]
그게... 아니, 아니에요...
이젠 변명도 소용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눈빛 속에서 내 모습이 또렷이 비쳤다.
[알카이드]
이건 책임져줘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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