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히아신스

2024. 6. 27. 20:00다음 역, 에덴/새싹 (예신)

 또 어느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느 날, 예신과 함께 에덴을 돌아다녔다. '열쇠'를 찾아보자고 했지만, 누구도 열쇠를 찾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엷은 화창한 날이라서, 예신의 손을 잡고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득 풀숲에 히아신스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여긴 예신이 처음 에덴에 나타났던 곳이었다.

 

[나]

제가 에덴에 막 왔을 때, 여기서 예신을 만났었죠. 그때 예신의 발밑에 이 파란색 히아신스가 피어 있었어요.

 예신이 고개를 숙여 발밑에 핀 파란색 꽃을 내려다봤다. 파란색 히아신스는... '생명'을 상징한다. 예신은 한참 그 꽃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나]

예신? 

 내가 고개를 들자, 예신은 바이올렛을 닮은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우린 정신 세계 안에서 원하는대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내기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외부 세계에 흐르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금까지 말이다. 다시 날 바라보는 오늘의 예신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신]

생각났어. 내가 이곳에 올 때 가졌던 마음가짐이.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을 회상하는 듯,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예신]

그때 난 천의 제국 은백의 제독이라는 신분으로 이곳에 와서, 또 다른 강력한 새로운 여행자를 찾으려 했어. 난 이 감옥을 만든 자와 협상해 그녀를 현실로 데려가려고 했지. 그녀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미래가 있을 테니까. 

 예신은 깊고 확고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날 바라봤다. 항상 부드러웠던 그에게서 강인한 군인의 기질이 느껴졌다. 

 

[예신]

난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내가 찾던 여행자라면 더더욱 여기서 멈취 서선 안 되지. 생명은 흐르는 물과 같아. 흐르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예신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가 뱉은 말은 내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쳤다. '생명'을 상징하는 파란색 히아신스가 예신을 일깨운 것일까. 그는 나에게, 우리가 조만간 이곳을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린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 순간, 난 이 꿈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감옥을 떠나려는 사람은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던 예신의 말이 떠올랐다. 이때 난 비로소 깨달았다, 감옥이 의지를 깎아낸다는 말의 의미를.

 지금 내게는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없었다. 이 작은 세계를 떠나면 예신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디저트를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고, 우린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시간은 계속 나아가고, 두 여행자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감옥에서의 시간에 미련을 품었다.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

"어스름히 보이는 당신의 실재를 쫓는다..."

난 그의 앞에서 함께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나]

예신, 줄곧 열쇠를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았어요. 그건 제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 작은 세계를 떠나버리면, 우린 다른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죠. 원래의 세계에서 예신과 저는 접점이 많지 않아요. 

 

[예신]

피어나는 생명만이 빛을 발하는 법이야. 주저한다면 서서히 씩어갈 수 밖에 없지. 우린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지만, 우리의 의지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어. 

 

[나]

그럼 약속해요! 

 난 예신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

예신, 약속해요... 현실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여기서 보낸 나날들을 잊지 않기로. 이건 그저 꿈이 아니에요. 오직 당신만이 실재하죠. 예신, 나의 불안과 의심이 손 끝에 스친 당신의 온도로 모두 녹았어요. 그리고... 예신은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난 대담하게 고백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차분했다. 이곳은 나와 그의 작은 세계다. 이곳에서는 어떤 말이든 다 할 수 있다. 

 

[예신]

"나의 불안과 의심이... 손 끝에 스친 당신의 온도로 모두 녹는다."

 예신은 가만히 책의 한 구절을 되되며 감탄하더니, 그의 기다랗고 단단한 손가락을 내 손가락에 걸었다. 

 

[예신]

약속할게. 돌아가더라도, 잊지 않을 거야.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의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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