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 2화. 사계절의 끝

2024. 2. 20. 01:30이벤트 스토리-2021/사계 사냥터

 

*본 화는 에르세르의 치명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반드시 에르세르 카이로스 편까지 시청 후 열람하시길 바랍니다.

 
 
 
 
 
 
 
 
 
 
 
 
 
 
 
 
 
 
 
 
 
 
 
 
 
 
 이 방은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가시덤불 새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방의 끝자락에 있는 수면 거울은 오랫동안 방치된 듯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왜 여길 온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을 뿐. 나를 이곳에 부르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하게 만든 이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수면 거울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울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 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빛을 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물속 깊숙이 숨겨진 소식이 전해지듯, 내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자그마한 빛무리가 생겨났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손바닥을 펼쳐 수면 거울에 마주 댔다. 전기라도 통한 듯 거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손바닥 중심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던 이내 수면 거울의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갔다. 뒤이어 수면 거울 가장자리에서 사계절의 메아리가 들려왔다. 사계절이 빠르게 지나가며 꽃과 반딧불, 단풍, 눈꽃이 읽혀들었다. 꽃잎은 낙엽을 감고, 반딧불은 눈송이 사이를 날아다녔다. 
 혼잡하게 뒤엉킨 사계절 너머에서... 나는 다시금 그를 마주했다. 

 그 시공의 끝에서 내게 아득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나]
정말 카이로스였어...
 
[카이로스]
결국엔 눈치를 챘군.
 
[나]
추측만 했을 뿐이에요. 이번 여정이 시작된 뒤로, 줄곧 나를 이곳에 불러온 사람이 누구였을지 궁금했는데, 그러다 카이로스를 떠올렸어요. 
 
[카이로스]
불쑥 데려와서 미안하군.
 
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옅게 떠올랐다.
 
[카이로스]
종종 그런 생각을 했지. 만약 그 재앙이 닥치지 않은 상대에서 네가 이곳에 왔더라면... 만약 그랬다면... 넌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즐겁기만 한 여정을 누렸을 거야. 이번에 네가 경험한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랬다면 애초에 만나지 못했겠지만. 내게 유일하게 남은 미련은 오직... 너뿐이다. 그런 네가 에르세르를 떠올릴 때마다 슬픔과 고통에 잠길 것이 안타까웠어.
 
[나]
그렇지 않아요. 내게 에르세르 대륙은 슬픔과 고통만 가득한 곳이 아니에요. 난 그보다 훨씬 많은걸 얻었어요. 
 
[카이로스]
그렇다면 다행이군. 
 
 카이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가 있는 시공의 균열에서 거울 밖으로 뻗어 나온 그 손은 실체 없는 환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도 손을 뻗었지만, 여전히 그에겐 닿지 않았다. 거울 너머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시공의 벽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카이로스]
잠시나마 널 볼 수 있어 기뻤다. 
 
[나]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제 질문에 카이로스는 답하지 않았다. 
 
[카이로스]
꿈에서 깨면 너는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울지 마라. 널 이 꿈에 초대한 건 웃게 해주고 싶어서였어. 이 아름다운 사계절은 너에게 보내는 내 축복이다. 
 
 수면 거울이 흐려지더니, 물결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수면이 다시금 잔잔해졌을 땐 이상 카이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내 주변에도 변화가 생겼다. 뭔가 다른 기류가 나를 스치자, 따스한 봄과 뜨거운 여름, 부산스러운 가을과 찬란한 겨울이 한 번에 느껴졌다. 흘러간 계절의 끝엔, 이별이 남아 있었다. 
 

에르세르 대륙에 다시 돌아가 즐겼던, 영원히 잊지 못할 이 순간들. 나는 그 여정 속에서 혼잡한 계절을 보냈다.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고, 또 진심 어린 미소를 얻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과거의 만남도. 그리고 이번의 재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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