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구조 요청

2023. 12. 25. 00:26다음 역, 에덴/프롤로그

도와달라는 목소리를 처음 들은 후 지금까지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내가 다니는 세인트셀터는 봉쇄 조치를 실시해 외출이 금지된 상태다. 하지만 수업은 여전히 평소대로 진행되고 있고, 교수님들도 곧 원래 모습을 회복할 거라며 우리를 안심시켜주셨다. 

 

-

 

교양 수업을 마진 난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세인트셀터는 뛰어난 실력의 교수진을 갖춘 평범한 학교처럼 보이지만, 실은 '피난처'라고 예신이 알려준 적 있었다. [각주:1] 예신이 속한 문명에서는 특수인이 모여 있는 이곳을 찾아낼 수 없다고 했다. 요 며칠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진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설상가상 지진의 이동 방향은 이곳, 피난처를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희미한 두통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누구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소년의 목소리... 도움을 청하는 그 목소리는 허공을 가로질러 내 머릿속에 홀러들었다. 

 

[???]

이 땅이 멸망하기 전에, 우리를 한번 봐주세요. 

 

누구야? 울먹거리면서도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구해달라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휘말려든다. 

 

[줄리]

으응? 왜 그래, 어디 아파? 

 

[나]

아... 괘, 괜찮아. 

 

친구를 안심시기려 했지만 결국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고 말았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선생님이 달려왔다. 

 

[유정호]

보건실로 데려가. 

 

끔찍한 두통이 덮쳐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친구들이 나를 양호실로 데려다준 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진이 심해지고 있으니 수업을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로 향하자, 억울한 표정으로 교수님과 이야기 중인 정재한의 모습이 보였다.

 

[정재한]

교수님,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도와줄 수 있냐고 물은 게 전부인데... 후배님은 체력이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에요. 제가 괴롭힌 게 아니라고요...

 

재한 선배... 나를 괴롭혔다고 오해받은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순간 또 다시 극심한 두통이 덮쳐왔다...

 

"4차 오류 테스트 종료"

"교정 진행 중."

995526

995525

995524...

 

더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 허공을 가로질러 들려온 목소리는 기계음 같았다.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카운트다운을 가리기는 숫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

재한 선배, 이 소리 들려요?

 

[정재한]

무슨 소리...? 후배님, 겁주지 마... 후배님이 새로운 괴담의 주인공이 되는 건 원치 않는다고. 

 

[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에요. 전 괜찮아요, 양호실에 데려다주서서 고마워요. 모두에게 폐를 끼쳤네요. 

 

[유정호]

학생, 큰 이상은 없다고 하니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거야. 

 

[나]

감사합니다, 교수님.

 

[유정호]

며칠 동안 지진이 네 차례나 일어났으니 예민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건강에 더 신경 쓰도록 하게. 

 

[나]

최근에 일어난 지진, 모두 세 번 아니었나요? 

 

[유정호]

자네가 잠든 사이 네 번째 지진이 일어났다네.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교수님과 친구들 모두 다정했지만 나만 이곳에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난 방금 내가 들었던 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4차 교정 테스트'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인근 해역에서 일어난 지진... 연관이 있는 걸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재한과 교수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나]

연이은 네 번의 지진... 너무 잦은 거 아닌가요? 

 

[정재한]

확실히 그렇긴 해. 게다가 이렇게 가다간 학생회는 더 바빠질 거라고.

 

[유정호]

학교도 임시 휴강을 검토 중이야. 학생,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이번 기회에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푹 쉬며 건강을 챙기라고 당부하는 교수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교수님이 떠난 뒤, 정재한도 학생회 동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나는 양호실에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도와달라던 소년의 목소리, '내게만 보이는 카운트다운'... 모두 단순한 환청이나 꿈 이 아닌 게 확실하다. 셀레인심 인근에서 일어난 네 번의 지진.. 휴강을 검토 중인 학교.. 4자 교정 테스트.. 게다가 수상한 카운트다운.. 그 카운트 다운은 내 망막 앞에 직접 비치는 것처럼 숫자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예신을 찾아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지 전화 연결도 잘 되지 않았다. 이제 난 뭘 할 수 있을까? 

 

'똑똑'

 

갑작스레 들리는 노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누구세요? 

 

[엘리샤]

나야, 괜찮아? 

 

엘리사 이사장은 엄마와 아는 사이지만, 평소에는 잘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각주:2] 카리스마 넘치는 새이사장님은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히 대해 주신다. 그녀 역시도 요새 일어난 수상한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다... 

 

[나]

전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저 대신 예신에게 연락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요새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만나서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엘리샤]

글쎄, 나도 연락을 안 한지 꽤 되어서. 그렇지만 최근 일어나는 지진 때문에 불안한 거라면 전문가를 찾아줄게. 예신 같은 예술가는 이런 일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예신이 도움이 안 된다라... 예신과 엄마는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과도 인연을 맺어온 모양이다. 갑자기 옆의 커튼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995475

995474

995473...

 

"5차 교정 준비 중..."

 

침대가 삐걱거리고, 탁자 위에 올려둔 물건이 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몸을 피할 만한 안전한 곳을 찾아 단단히 고정된 물건을 찾으려하는데... 엘리사가 갑자기 나를 감싸 안으며 몸을 숙였다. 

 

[엘리샤]

조심해!!

 

날 데리고 몸을 낮춘 채 엘리사가 쓰러질 것 같은 지지대를 붙잡았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우린 가만히 기다렸다. 이전보다도 더 심한 진동이었다... 속보가 떴다면 이번 진앙지는 셀레인심 인근라고 보도할 게 분명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고요함을 되찾았다. 

 

[엘리샤]

미안, 아무래도 같이 있어줄 수 없을 것 같네. 상황을 파악하러 가봐야겠어.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던 평소와 달리 잔뜩 헝크러진 머리,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이사장님은 셀레인심의 학생들, 그리고 내게도 언제나 따뜻한 관심을 보여준다. 

 

[나]

제가 죄송하죠! 전 그냥 평범한 학생일 뿐인데, 이사장님께 괜한 부탁을 드렸네요.

 

[엘리샤]

왜 사과하는 거야?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나를 찾으렴. 

 

엘리샤가 떠나고 나자,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겨울의 풍경, 저 아득한 곳에서 먹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 카이로스 ]

정재한이 쓰러졌다고 하던데. 괜찮아?

저는 별 일 없는데... 선배는요?

지진이 일어났을 때 복도에 있었어. 큰 피해는 없었고, 다만 학생회 중 누군가가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다쳐서, 이쪽 일을 처리하고 있었어.

누가 넘어진 건가요?

응. 심각한 일은 아니야. 보건실에 연락했으니 곧 의사가 도착할 거야.너도 조심하고.

 

 

[ 아인 ]

너. 괜찮아?

아인 선배, 부재중 방금 봤어요. 지진 났던데, 선배는 괜찮아요?

괜찮아. 장비가 넘어진 거 말고는.

요 며칠 새 재수가 없네요.. 매일 불안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내가 찾아갈게.

응? 저 완전 괜찮아요! 지금 나오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금방 갈게. 그럼 이만.

 

 

 

[ 알카이드 ]

선배, 괜찮아요? 제 쪽은 괜찮은데 걱정되어서...

나도 괜찮으니 안심해. 네 목소리 들으니 안심되는 기분이네.

괜찮으니 다행이에요. 참, 아친이는요? 많이 놀랐으려나..

화분이 깨져서 좀 놀란 모양인데, 괜찮아. 내가 잘 돌볼게.
너도 마찬가지로.

저도.. 네?

지금 상황을 보면 지진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그 동안 네가 안전했으면 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 알겠지?

 

 

[ 로샤 ]

로샤, 방금 지진, 괜찮아요?

마침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핸드폰이 울리는 걸 보니 우리는 역시 마음이 맞는 것 같아.

둘 다 괜찮았으면 됐네요.

그러게, 전부 괜찮았으면 좋겠네. 이번 지진은 제법 강한 것 같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지진이 끝나면 내 일도, 네 생활도 원래대로 돌아올테니.

 

 

 

[ 예신 ]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무슨 뜻이지? 연락이 두절된 예신이 오랜만에 내게 보낸 메세지는 '가지 마' 이 말 뿐이었다.

어디를 가지 말라는 거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아니면... 다른 세계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예신은 내게 여행자의 피가 흐른다고 했지만, 나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런 거대한 상황과 마주치고싶지 않았다.

이것들이 내 생활에 영향을 끼치기 전까지는.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보호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준비를 해야한다.

  1.  비밀의 여정 스토리 참고 [본문으로]
  2. 캠퍼스편 16화 참고 [본문으로]

'다음 역, 에덴 > 프롤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화. 에덴으로의 첫 걸음  (0) 2023.12.25
1화. 지진  (0)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