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하늘에서 내려온 독자

2023. 12. 24. 13:05프롤로그(完)

로샤가 내 만화의 팬이라고?!

 

배를 대충 둘러보자, 갑판 반대편에서 발코니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발견했다. 사다리를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개방적인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모처럼이니 그림이나 그려볼까? 나는 이젤을 조립하고, 종이를 세팅하며 무엇을 그릴지 고민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느끼니 문득 예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소재를 정리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커다란 남성의 실루엣이 드리운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을 보자 내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금발과 아쿠아마린을 담은 듯한 투명한 눈동자, 날렵한 턱선. 꿈속에서 몇 번이고 만났고, 그 윤곽을 몇 번이고 그렸던-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 이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발의 남자]

안녕. 이 발코니, 같이 써도 괜찮을까?

 

그 얼굴은 만화 속 황제와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다-

 

[꿈과 현실] 이건 무슨 환각이지? 어째서 꿈 속 사람이 현실의 인간으로... 아니 이건 닮았다고 해야하나?

 

아무리 슬럼프래도 캐릭터가 현실로 나타날 필요는 없지 않아?!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한발짝 더 물러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 그 힘찬 손가락이, 나를 현실로 연결해주었다. 이건... 살아있는 인간의 온도...

 

[금발의 남자]

갑자기 잡아서 실례하지. 그렇지만 이 이상 뒤로 갔다간 바다에 떨어지고 말테니깐. 수영은 특기지만, 바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떼자마자, 긴장의 끈이 풀렸다. 정말 우연히 닮았을 뿐이니깐...

 

[나]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당신이 진짜 인간이라...)

 

[금발의 남자]

레이디에게 소개가 늦었군. 나는 로샤 로렌하이트[각주:1]라고 한다.

 

[나]

으으음, 로샤...?

 

내가 당황하는 얼굴로 대답하자, 눈앞의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다음 입시엔 내 이름을 문제로 내도록 해야겠군. 뭐, 좋아. 로샤라고 불러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건 그렇고,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호피 무늬 옷을 보자면 교원도 아닌 것 같고...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처럼 만났으니 친하게 지내자.

 

[나]

맞다, 발코니를 사용하고 싶다고 했죠?

 

[로샤]

응, 책을 읽고 싶어서. 여기는 책을 읽기 딱 좋거든.

 

여행 중에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니, 이 세상에 예신 말고는 없을 줄 알았는데 신기한 사람이네. 역시 사람은 겉보기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더니.

 

[나]

무슨 책을 읽을 건데요?

 

로샤 씨는 작은 책을 내게 내밀며 자신 있게 말했다.

 

[로샤]

이거야!

 

그 손에 들린 책은-- 무려 [꿈의 끝에] 단행본이었다!!

 

[나]

이건...

 

나는 무심코 말을 삼켰다. 그는 나의 반응을 오해한 듯, 기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로샤]

혹시,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나?

 

[나]

조금요, 뒷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나는 철저히 작품과 연관이 없는 척을 했다. 로샤씨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로샤]

그렇구나. 유감이네. 나는 이 작가의 팬이라 사인을 받는 게 꿈이거든.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문득 손에 책의 무게가 느껴진다.

 

[로샤]

빌려줄게, 마음 내키면 읽어봐. 마음에 든다면 그냥 선물하지. 사양할 필요는 없어. 같은 걸 여러 권 갖고 있거든. 너도 그림을 그리는 것 같으니 공부가 되지 않을까?

뜻밖의 독자 강림. 게다가 작가에게 만화를 선물하다니... 책 표지, 만화 칸, 대사... 그동안 여러 번 봐왔던 내 작품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데, 예신이 갑판 위로 걸어왔다.

 

[예신]

거기에 있니?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나]

응, 여기예요.

[갑판 위에서] 만화 속 황제와 은백의 기사의 현실판? ...너무 터무니 없다.

 

[예신]

아아, 로스차일드 씨도 계셨군요.

 

예신과 로샤 씨는 아는 사이인 건가?

 

[예신]

여기는 로샤 로스차일드 씨야. 페이스요튼[각주:2] 그룹의 총재로, 세인트 셀터 학원의 최대 투자자 중 한 분이셔.

 

[로샤]

자기소개라면 이미 끝낸 참이야. 그렇지?

 

로샤씨가 내게 윙크했다. 눈앞에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만화 속 황제와 실버나이트의 현실판 느낌! 안돼, 또 만화 생각을 해버렸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석양이 천천히 수평선으로 가라앉고, 셀레인 섬의 윤곽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로샤]

오늘은 바다가 잔잔하니 문제없이 섬에 도착할 수 있겠군.

 

[예신]

입학 축하해.

 

[로샤]

축하해. 멋진 어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디뎠군. 장래에는 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예신]

그 부분은 동의할 수 없군요.

 

[나]

고, 고마워요, 두 분 다...

 

그 때, 뱃고동이 울려 퍼진다. 곧 도착이다.

 

예신과 함께 배에서 내려 사람의 흐름을 따라 걷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인트 셀터 학원의 교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신]

내일쯤이면 자취방이 정해질 테니 또 연락할게, 임시 숙소에는 혼자서 갈 수 있겠니?

 

[나]

응, 고마워요!

 

[예신]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렴.

 

교문을 걸어 들어가려는데, 예신이 나를 불러세웠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의 목소리는 항상 내게 와닿았다.

 

[예신]

만화... 말인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려질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예신에게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눈앞의 문을 빠져나갔다. 수험 공부 중 몇 번이나 꿈꿨던 학교생활이 시작된다.

  1. 로스차일드 [본문으로]
  2. 프레스트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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