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선상 위에서.

2023. 12. 24. 11:58프롤로그(完)

모든 건, 크루즈 선에서의 신기한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

나야말로, 너를 이런 장소에 가둬두고 싶지는 않아. 네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그 미래를 빼앗는다는 건... 정말 아깝다만, 무의미한 환상 따위 갖다버려. 이 이상 기다려도 소용 없어. 그 녀석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거든. 이긴 건 나다. 승자 옆에 있는 편이 현명하다 생각하지 않나?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반복적으로 꾸는 꿈 속에서 그 눈빛은 점점 칼처럼 차갑게 변해간다. 꿈 속임에도 마치 현실처럼 파고드는 시선에 흠칫하며 눈을 떴다. 손에 쥐고 있었을 펜이 책상 구석에 나뒹구는 게 시야에 들어오고, 하늘거리는 선실과 파도 소리를 듣자, 현실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세인트 셀터 학원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리던 원고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내가 연재 중인 만화. 마지막 한 컷, 이세계 황제가 승리 선언을 하는 부분에서 멈춰있는.

 

1년 정도 되었을까. 나는 눈이 흩날리는 대륙의 꿈을 반복해서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희미했지만, 서서히 그 세계에 인물들이 등장하며 세계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결하고 올곧은 은백의 기사와 잔혹한 폭군. 은백의 기사는 국민을 모아 폭군과 싸우기 시작했고,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수년간 지속된다. 어떤 소녀가 말려들 때까지... 쉽게 말하자면, 로맨스 판타지였던 것이다. 나는 이 꿈의 세계를 만화로 만들어 '시공 속으로' [각주:1]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발표했다. 운 좋게도 편집자의 눈에 띄어 단행본까지 출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클리셰 범벅인 러브스토리 전개에 막혀버리다니... 지난 2주간 만화를 전혀 그릴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생 첫 슬럼프인 것이다. 책상에 흩어진 원고 속에, 오래전 구상한 제 1권의 결말이 있었다.

 

‘은백의 기사는 목숨을 잃고, 소녀는 폭군의 덫에 빠진다.‘

 

스토리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전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는 걸까? 내 구성력의 문제? 아니면... 캐릭터에 너무 정들어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선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

조식 챙겨왔어.

 

[나]

미안, 생각이 없어서요.

 

예신이 들어오자, 그와 함께 바닷바람이 방으로 흘러들어온다.

 

[예신]

어제 밤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지?

 

[나]

조금 뱃멀미를 해버린 것 같아요... 하아, 지금 당장 흔들림이 가라앉을 수는 없을까요?

 

[예신]

...미안, 그 소원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오후 6시에는 셀레인섬에[각주:2]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힘내.

 

설마, 정말로 흔들림을 멈출 방법을 생각한 건가...? 뱃멀미가 다 나은 건 아니지만, 예신 덕분에 조금 기분이 편해졌다.

 

[예신]

배의 주방을 빌려서 네가 좋아하는 딸기 토스트를 만들었어. 로즈티도 끓였으니 조금이라도 먹는 게 좋을 거야.

 

빵의 달콤한 향과 과일의 상쾌한 향이 만나 코를 간지럽힌다.

 

[나]

입학하게 되면 예신의 수제 요리가 그리워질 거예요.

 

[예신]

안심해.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시간을 내어 갈게. 나도 학교에 있으니깐.

 

그렇다. 내가 입학할 세인트셀터 학원은 예신의 직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학부의 교수인지는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

미술대학의 합격통지가 왔을 때 나는 바로 예신에게 보고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그의 반응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니깐. 지금도 그는 따스한 웃음을 띄우며 내 앞에 서 있다.

 

[예신]

사실 이번 학기 중에는 여러 가지로 일들이 좀 있어서, 지금까지처럼 매일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네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 만나러 갈게.

 

 

[나]

이야기 속 기사 같네요. / 그건 제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인가요?

 

내 이야기 속에선, 그 역시 비슷한 맹세를 했었기에 나도 모르게 내가 그리던 은백의 기사를 떠올렸다.

 

[예신]

나는 네 만화 캐릭터가 아니야.

 

예신은 목소리 하나 바꾸지 않고 내게 충고했다. 생각하는 걸 전부 들켰다니.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원고를 만지작거렸다.

 

 

나의 어머니는 생전 예신에게 나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고, 지금까지 나를 돌봐줬다. 내 안에서의 예신은 언제나 상냥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가족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던 몇 년 동안 그는 줄곧 가장 가까이서 나를 지탱해주었다. 이후 내가 그림을 배우고 미대에 가길 선택했을 때도 예신은 언제나처럼 내가 선택하는 길을 응원해주었다. 그래서 꿈속에서 은백의 기사가 나타났을 때, 그의 얼굴이 예신의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신은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 원고에 돌렸다.

 

[예신]

요즘 만화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 너에 대해선 잘 알고 있어.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 창작자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를 보거나, 듣거나, 경험하는 건 중요하다고. 날씨도 좋으니 갑판에 나가보는 건 어때? 학교의 학생들이 많던데, 친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예신이 나간 뒤, 나는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갑판을 오가는 낯선 사람들과,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원래 살던 곳에서 한참 떨어져 왔음을 상기했다.

 

그렇구나... 그럼-

 

 

[선택] 갑판을 걸어본다.

 

 

갑판으로 나가자, 바닷바람이 뺨을 쓰다듬으며 상쾌한 기분이 든다. 내가 입학할 세인트 셀터 학원은 이름이 조금 특이하지만, 연구와 예술에 특화된 대학이다. 특히 미술학부는 업계의 평가도 높은 편이다. 거기에 더해, 소문에 의하면 화가 ‘에메랄드’가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한다.

에메랄드는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수수께끼의 화가. 그의 그림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마지않는다. 그가 이 학교에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세인트 셀터 학원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나는 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겠지? 졸업 후에는 어떤 작품을 그리게 될까?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곧 시작되는 학원 생활이 매우 기대된다는 것 뿐.

  1. 꿈의 끝에서 [본문으로]
  2. 라이라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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