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경연 전 준비

2023. 12. 25. 15:23캠퍼스 편(完)

꿈에서 또 다시 설원에 쓰러진 실버나이트를 보았다...

 

 

한가로이 캠퍼스를 거니는데 '별들의 경연' 관련 소식만 들려온다. 행사가 바짝 다가왔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도 시끌시끌한 걸 보니 역시 재한 선배네. 학생회 듀오가 행사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정재한]

이만하면 많이 했잖아, 회장님, 나 집에 좀 보내주라! 몸살 날 것 같다고. 

 

[카이로스]

엄살 떨지 마. 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정재한]

이번엔 진짜 아파! 그리고 이번 경연은 이상하다는 거, 회장도 알고 있잖아! 

 

[나]

재한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재한 선배는 나를 보고 반색했다.

 

[정재한]

어! 후배님! 후배님 잘 왔다, 내 에기 좀 들어봐!

 

앗, 이거 왠지 내가 들으면 곤란한 얘기일 것 같은 느낌이... 정재한은 바싹 내쪽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정재한]

지금부터 내 에기 잘 들어...

 

하지만 카이로스 선배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

 

[카이로스]

정재한! 소곤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정재한]

으이그, 알았어. 후배님, 이번 경연 말이야, 문제가 많다니까?

 

[카이로스]

신입생, 이 녀석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경연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일이 많아져 매사에 불만인 놈이니까.

 

[나]

네에? 일정이 앞당겨졌다고요?

 

[정재한]

그래! '별들의 경연'은 원래 1학기 중반에 개최됐거든? 근데 올해엔 갑자기 개학 전으로 앞당겨진 거야. 일방적으로. 아니, 방학 중에 경연 준비라니 학생들한테 너무한 처사잖아. 

 

카이로스 선배는 굳이 재한 선배의 말을 막지 않았다. 어쩌면 카이로스 선배 역시 이번 일로 불만을 품은 건지도.

 

[정재한]

그건 둘째 치고, 오늘 낮에 내가 강당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무슨 기괴한 목소리들이 나더라고. 그래서 문틈으로 들여다봤더니... 안에는 아무도...!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어...! 

 

[나]

그런... 혹시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정재한]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고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고!

 

[카이로스]

좋아, 그게 사실이라 치고. 그럼 그 기괴한 사람들이 무슨 에기를 주고받았지?

 

재한 선배는 멈칫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재한]

못 들었어. 아, 아니, 내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 그, 그래도 사람 목소리는 확실했어!

 

나와 카이로스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재한]

저기, 후배님...? 회장...? 지금 나 못 믿는 거?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건 카이로스 선배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정재한]

으아아아! 지금 날 한심하게 여기는 거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똑똑한 놈이야! 내가 학생회장이라고 했을 때 신입생 중에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거든?!

 

[카이로스]

가서 일이나 해. 날 사칭한 건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에기하지.

 

똑똑한 재한선배, 자폭했네... 재한 선배는 아무 말도 못한 재 풀이 죽어 그 자리를 떠났다.

 

[카이로스]

신입생, 날이 어두위졌어. 쓸데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귀가해.

 

[나]

제 이름은 '신입생'이 아니에요. 그리고... 선배, 방금 그 이야기 진짜 믿는 건 아니죠?

 

[카이로스]

나는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뭐가 됐든 안 믿어. 학생회장인 만큼 학생 개개인의 안전을 챙기는 것 뿐이다. 귀가하는 길엔 강당을 피해 멀리 돌아가도록 해, 신입생.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카이로스 선배는... 끝까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씻고 누운 뒤로도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이나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아아... 또그 꿈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나비들은 반짝이는 날개를 팔락이며 일제히 날아오르고, 하늘에서는 싸늘한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황제가 소녀에게 말한다. 

 

[황제]

그는 더 이상 없다. 포기하고 얌전히 짐의 신부가 되어라. 너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나누어주지.

 

실버나이트는 여전히 설원에 쓰러져 있다. 그의 곁을 지카고 있는 것은 정금석 목걸이... 그가 소녀의 손에 취여줬지만 산산이 부서져버린 사랑의 증표뿐이었다.

 

[실버나이트]

그 누구도 너에게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내가 널 지켜줄게. 반드시.

 

여기까지는 늘 보던 내용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여자의 상이 맺혔다. 깊은 한이 서린 듯한 그녀의 모습은 더없이 처연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 아니 잠깐! 저 사람은...!

 

채린?!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깬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꿈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다. 예전 같았으면 새로운 전개에 기뻐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채린이랑 똑같이 생긴... 원혼이라니...! 아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고 싫다! 꿈속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들이 겹쳐가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게 꼭 무슨 의미라도 되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곧장 예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상담하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분명 자고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채린]

자니?

 

[나]

아직 안 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채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내일 경연에서 나, 꼭 잘할게! 

 

[나]

당연하지! 네가 제일 멋지게 해낼 거라고 믿는걸!

 

[채린]

고마워.

그럼 잘 자.

내일 봐.

 

문자를 보니, 곧 불안하기만 했던 꿈의 내용이 중요지 않게 느껴졌다. 마음이 진정된 나는 나 자신에게 조용히 '잘 자'라고 말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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