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개학 전 연습

2023. 12. 25. 15:11캠퍼스 편(完)

비싼 아인과... 비싼 나.

 

 

곧 개강이니 바빠지기 전에 짬을 내어 학교에서 그림 소재를 찾기로 했다. 로사와 만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로 다행히 연재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정원을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청음관이었다. 다른 단과대 건물들보다 월등히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청음관의 외관에 나는 감탄을 금지 못했다. 

 

-

 

 아직 개강 전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연습실에서 전공 악기를 연습하는 소리가 건물 밖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연습실의 유리창을 통해 학생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악기 연주자들은 정말이지 멋졌다. 재한 선배가 한 떨기 꽃 어쩌구 하며 과장했던게 이해가 갔다.

 그때, 뭔가 다른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자, 등줄기를 따라 전율이 홀렸다.

 

 지금까지 들어온 그 어떤 음악도 이 피아노 연주만큼 인상적이진 못했다. 홀린 듯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간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한 듯 서버렸다.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연습실 안에선 흑발의 소년 한 명이 연주에 여님이 없었다. 그가 휘몰아치듯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는 격정적인 비명을 토해냈다. 앳돼 보이는 연주자의 몸 어디에 저렇게 뜨겁고 강한 열정이 숨어 있을까. 짧은 순간, 나는 완전히 그의 연주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스게치북과 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린 그림은 햇살 아래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년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벼린 검으로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맞서 싸우고 있는, 강인한 투사. 그의 눈빛은 더없이 사납고 당당한 자세는 끝간 데 없이 오만했다.

 그러나 인물 뒤의 배경을 그리려던 순간, 내 펜은 그대로 멈취버렸다. 소년이 검을 들고 싸우는 그곳은 과연 어딜까. 그의 뒤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 걸까.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나는 누군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몰랐다. 

 

[???]

누구십니까?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실내에서도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장정들. 위압감이 대단했다. 조폭인가...? 그런 사람들이 왜 학교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나]

아, 안녕하세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기에 저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호원 1]

아가씨, 그림은 다른 데 가서 그려요. 여긴 안 됩니다.

 

[???]

아아, 정신 사나워. 누가 찾아온 거야?

 

나는 그제야 피아노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아노를 지던 소년은 연습실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경호원 1]

죄송합니다, 아인 도련님. 이 아가씨가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떴다! 경호원의 대사! 그나저나 아인이라는 이름, 제법 듣기 좋다. 소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나를 관찰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나는 온갖 센 척을 하며 항의했다. 

 

[나]

세인트 센터 학생이 학내 건물에 들어오는데 왜 허락을 얻어야 하나요? 오히려 외부인 쪽이 허락을 얻어야 하는 거 아니고요? 

 

나는 당당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경호원 1]

......

 

아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인]

손에 든 건 뭐지? 

 

[나]

아... 허락 없이 모델로 삼은 건 미안해요. 어차피 미완성이지만, 그림은 드릴게요, 그럼 이만. 

 

나는 스케치북 낱장을 뜯어 그에게 건네주고 재빨리 돌아섰다. 

 

[아인]

잠깐. 거기 서.

 

애써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아인]

거기 서라고 했어. 술래잡기라도 하고 싶은 거야? 

 

학내에서 저 떡대들과 술래잡기? 진심? 어쩔 수 없이 멈춰셨지만 속에서 불이 확 치밀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나]

그림 드렸으니 됐잖아요! 

 

아인은 발끈하는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비웃은 건 아니겠지? 

 

[아인]

안으로 들어와. 

 

[나]

네...? 연습실로요? 갑자기 왜...? 

 

그는 완성하지 못한 내 그림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인]

마저 그려. 그렇게 미련이 잔뜩 남은 얼굴로 고집부리지 말고. 

 

내 얼굴에 미련이 잔뜩 남았다고...?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난 저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다. 등으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외면한 재, 나는 아인을 따라 당당하게 연습실로 들어갔다. 그림을 마저 그리기 위해 자리를 잡으며, 나는 문 앞의 두 사람에 대해 물었다. 

 

[나]

뭐 하는 사람들인가요? 진짜 경호원이에요? 

 

아인은 다시 피아노 스툴에 앉아 두 손을 건반에 살포시 올리더니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인]

그냥, 엑스트라들. 

 

화려한 피아노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나]

다 그린 그림은 여기 둘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나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연습을 마셨는지, 아인도 건반 덮개를 덮고서 나를 딴하 쳐다봤다. 

 

[나]

하실 말씀이라도?

 

[아인]

학내 시설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별도로 관리되는 특별 개인연습실이라서. 그리고 오늘 일은 영광으로 알아. 아무나 내 연주를 들을수 있는 게 아니거든. 난 비싼 몸이라. 

 

[나]

...?

 

내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고 있자 그도 침착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림을 가리켰다.

 

[나]

그럼 이 그림은 당신에게 지불한 티켓이라고 생각하세요.

 

무표정하게 건너다보는 아인을 향해, 나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나]

사실, 나도 아무에게나 그림을 그려주지 않거든요. 그쪽만큼이나 비싼. 몸이라서. 그럼 이제 계산 끝난 거죠? 

 

'캠퍼스 편(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화. 경연 전 준비  (0) 2023.12.25
13화. 접근금지  (0) 2023.12.25
11화. 첫 번째 손님  (0) 2023.12.25
10화. 만화 속 세계  (0) 2023.12.25
9화. 무대 구경  (0)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