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첫 번째 손님

2023. 12. 25. 15:08캠퍼스 편(完)

로샤는 내 갤러리의 첫 번째 손님이 되어주었다.

 

 

더없이 우아하고 진지한 대도로 갤러리를 감상하던 로사는 작품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나를 불렀다.

 

[로샤]

음... 이 작품을 사고 싶은데. 

 

[나]

...왜 하필 이 그림이에요? 

 

[로샤]

마음에 드니까. 

 

[나]

죄송하지만, 이것보다 더 세련된 그림을 보여드릴게요. 솔직히 이건 좀...

 

로샤가 관심을 보인 작품은 내가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던 당시 그린 것이었다. 기교가 도무지 늘지 않아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을 그림에 전부 쏟아넀던.

 

[로샤]

그림이 발산하는 노골적인 분노가 마음에 들어. 꽉 막힌 영감들을 상대해야 하는 회의실 벽에 걸어두면 딱 좋겠군. 작품가는 이 정도면 되나?

 

그가 휴대전화에 찍어 보여준 숫자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

그럼요, 고객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역시 양심에 찔려, 비슷한 주제의 작은 그림 한 점을 함께 선물하겠다 했더니 로샤가 무척 감동해했다. 두 점의 작품을 조심히 포장하던 중,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나]

아, 그렇지! 

 

로샤가 만화가의 사인을 갖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추상화의 뒷면에다 멋들어진 사인을 남겼다. 

 

[나]

짜잔. 갤러리 개관 기념 작가 친필 사인! 

 

로샤는 가까이 다가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사인을 들여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로샤]

이건... 고대 상형문자?

 

[나]

로사! 

 

펄펄 뛰며 화내는 나를 보며, 로샤는 즐거위 못 견디겠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로샤]

자,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작가님의 작품과 영광의 진필 사인은 잘 간직할게. 

 

[나]

아... 잠깐만요! 

 

씩 웃으며 돌아본 로샤는 또 한 번 장난을 걸었다. 

 

[로샤]

자꾸 붙잡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가씨는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 만화 캐릭터 중에 누굴 가장 응원해요? / 만화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로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황제가 소녀와 이어졌으면 해. 하지만... 독자는 어디까지나 기다리는 사람이자 지켜보는 사람이지. 바로 '작가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말이야. 

 

왠지 위로처럼 들리네... 만화 속 황제와 달리 로사는 정말 따뜻한 사람인 것 같아.

그날 밤, 내 무릎 위에서 세상 모르게 잠든 나비 녀석과 달리 나는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림을 팔았다. 예신의 말대로, 내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은 거다. 만화 연재 슬럼프로 잠시 주춤했던 열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회화도, 만화도 모두 다 잘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노력해야 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 잠도 안 오는 밤, 나는 교재를 필치고 본격적으로 학과 예습에 들어갔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피곤에 지쳐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꿈조차 꾸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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