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5. 00:13ㆍ캠퍼스 편(完)
무대를 구경하러 왔다가 조나단 이사장을 마주쳤지만, 다행히 로샤의 도움으로 빠져나왔다.
저녁 무렵 나는 채린의 연습을 구경하러 무용 연습실에 들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채린은 전혀 집중하지 못했고, 몇 번이나 연습을 중단하곤 했다.
[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야?
[채린]
경연 순서가 정해졌어. 내가 첫 번째래. 어떡하지? 나... 너무 떨려.
채린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나 역시 실기시험 전날이면 부담감 탓에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깐. 그때 예신은 어떻게 날 위로해줬더라...
[나]
채린아, 나랑 같이 무대 보러 가지 않을래? 원래 중요한 시험 질 때는 시험장에 미리 가보고 적응하잖아. 어때?
채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망설였다.
[나]
잠깐 바람도 쐴 겸 다녀오자, 응?
채린은 잠시 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
그래, 좋아. 가보자.
곧장 경연장으로 향해 살그머니 문을 열어보았다. 무대는 '출입금지' 경고문이 붙은 펜스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었다.
[채린]
역시 못 들어가게 할 줄 알았어.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자. 무대는 봤으니, 충분해.
[나]
음. 잠깐 여기서 기다려봐, 내가 확인해보고 올게.
공연장 내부는 몹시 어두웠다. 나는 무대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혹시라도 들어갈 틈이 있을까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어두운 공간에서 발을 헛디딘 나는 크게 비틀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나를 붙잡았다.
[나]
누, 누구...?!
놀란 내 가슴은 익숙한 웃음소리를 듣고서 더 크게 두근거렸다.
[???]
다시 만나서 반갑군. 그런데... 매번 굳이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만나야 하나?
로샤?! 나를 받쳐준 사람은 놀랍게도 갑판 위에서 만난 바로 그 사람, 로샤 로렌하이트였다.
[나]
당신이 여기 왜...?
[???]
거기 누구 있나?
객석 너머에서 강릴한 라이트가 비쳤다. 눈이 부신 나머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로샤는 내 앞을 막아서며 강한 빛을 가려주고 느긋하게 말했다.
[로샤]
아아, 접니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중 한 명을 알아본 나는 머리끝까지 쭈뼛했다.
[조나단]
로렌하이트 씨? 여긴 무슨 일이오?
조나단 이사장은 왠지 예민해 보였다.
[로샤]
경연을 위해 무대를 미리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건 내 이유인데... 설마 나를 도와주려는 건가...
[조나단]
하지만 당신은 심사위원이지 않소.
[로샤]
별들의 경연은 매년 TV로 중계되지 않습니까. 심사위원도 카메라에 비치는 복장을 체크해야죠. 그게 방송예술에 대한 예의니까요.
이사장은 나와 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등지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나단]
자네들은 왜 여기 있지? 마지막 점검 중이라 무대엔 들어갈 수 없네. 학교 측에선 경연을 순조롭게 진행시켜야 할 의무가 있으니 말일세.
[나]
아... 그, 그게... 저희는...
[로샤]
진정하세요, 이사장님. 이 친구들은 제가 데려왔습니다. 의견을 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이런 어설픈 거짓말을 이사장이 과연 믿어줄까? 다행히 이사장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최대 투자자인 로샤의 체면이 있으니 그 앞에서 우리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
[조나단]
확인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주시오. 그리고 자네들은 잠깐...
출구로 향하던 로샤는 우리를 부르는 이사장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로샤]
참, 내가 데려다주기로 했었지? 아가씨들끼리만 다니기에 이 세상은 너무 어둡고 위험하다고?
로샤의 의중을 바로 눈치챈 나는 채린의 손을 잡아끌고 번개같이 그를 뒤따랐다.
[나]
이사장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
강당에서 도망쳐 나오니 이제야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둡고 위험한 세상'이라니, 너무 억지잖아. 그래도... 로샤 덕분에 살았다. 나 때문에 난처했을 텐데도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를 보자 긴장이 탁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
저희를 데려다주실 거라고요?
[로샤]
물론이지. 이렇게 어두운데 나 혼자 길을 걸으면 무서울 것 같은데.
[나]
보답의 의미로, 가시는 길까진 이 레이디가 에스코트해드리죠.
-
나와 로샤는 채린을 먼저 기숙사까지 바래다주었다. 헤어지기 전, 채린은 갑자기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여리고 가냘픈 그녀의 몸은 조금만 힘을 쥐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채린]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고마워. 나, 너를 위해서라도 힘낼게. 경연 꼭 보러 올 거지?
나는 다시 한번 채린을 꼭 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운을 낸 것 같은 채린의 뒷모습을 보니,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로샤]
드디어 그대와 나, 단둘만 남게 됐군.
채린이 기숙사로 들어가자, 로샤가 돌연 뜬금없는 소릴 했다.
[나]
네?
이거... 어쩐지 불길한 대사인데... 로샤를 볼 때마다 만화 속 폭군 황제의 모습이 겹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어쩌면 저 말투 때문인지도.
[로샤]
줄곧 궁금했던 게 있는데, 내 질문에 가감없이,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로샤의 웃음기 쪽 빠진, 진지한 얼굴이 더없이 낯설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입이 마르고 맥박이 탈라졌다. 뭐지..? 본색을 드러내려는건가...?
[로샤]
지난번에 내가 빌려준 만화, 다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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