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3. 15:43ㆍ각성의 장/용성 편 (아인)
그래, 그녀와 그는 함께 가면을 쓴 채 꼭두각시를 연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높은 곳에 앉아 있지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미소로 마음을 감추고 적 앞에서 무대를 필진다.
아인이 다실에 앉자, 꼭두각시의 껍데기를 쓴 그녀도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나]
악당 연기를 이렇게나 잘할 줄은 몰랐네요.
[아인]
원래는 악당이 아니고?
[나]
당연하죠.
소녀는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옛날에 무대회에서 다들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도, 내가 선배를 찾아냈던 거 기억 나요?
[아인]
그때, 네가 그랬었지.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넌 알아볼 수 있다고.
[나]
당연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사람들은 선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네요.
[아인]
난 오히려 아무도 몰라줬으면 좋겠는데.
아인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인]
그걸 이해라고 표현해야 할까... 날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오히려 난 자유를 잃게 될 거야. 내겐, 너 하나만 있으면 돼.
아인과 소녀의 비밀스러운 연락이 그렇게 시작됐다. 소녀는 자주 연락하지 못했지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경계 밖 손님에 어떻게 맞설지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가면을 쓰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로 약속했다.
-
[아인]
감정 채집 장비를 개조하자고 제안하는 게 내 첫 번째 계획이야.
아인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아인]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 같이 감정이 고조되는 일을 할 때면 감정의 힘은 더 많이 생산돼. 이론적으로 봤을 때, 이 과정은 인간의 계산능력과 관련이 있어.
[나]
계산능력이요?
[아인]
계산능력도 채집할 수 있도록 설비를 개조할 계획이야.
[아인]
감정의 힘은 녀석들에게 넘기고, 부산물로 나온 계산능력은 그룹에서 관리하는 중앙 컴퓨터에 전송하는 거다.
[아인]
사람의 계산능력은 유용하니까...
소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아인]
뭐해?
[나]
...정말로 해킹 기술을 익히고 있었군요!
소녀가 의자에 앉아, 모니터에 있는 내용을 훑었다.
[나]
윽... 이걸로 내가 선배 컴퓨터를 마음대로 뒤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지금 전 큰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요, 큰 계획!
[아인]
마음껏 봐.
잠시 망설이던 아인이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인]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인의 계획은 간단했다. 바로, 경계 밖 손님의 함대 방어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 경계 밖 손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인류에게 남은 컴퓨터로는 그 정도 수준의 데이터 계산이 불가능할 테니까. 아인은 하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용의 도시 주민들의 지혜를 합치는 것. 그러 면 경계 밖 손님들의 강대한 기술에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었다. 누구도 그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상상한 적 없는 미래였다.
[아인]
계산능력을 채집하는 방식은 성공적으로 구축했어. 하지만 경계 밖 손님이 사용하는 방어 모드가 너무 특수해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관련 자료나 그쪽 방면의 전문가가 있다면, 우리 계획은 훨씬 더 앞당겨질 거야.
[나]
좋아요. 그쪽 방면은 저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찾아볼게요. 참, 예전에 전쟁 때 인류에게 그쪽 방면 부서가 있지 않았나요?
[아인]
내가 용의 도시에서 알아봤는데, 그 부서 사람들은 다 지상에서 전부 목숨을 잃었을 거야.
[나]
......
[아인]
...이 얘긴 여기까지 하자. 또 다른 할 말 있어?
[나]
아뇨. 그래도 오늘은 감시가 느슨해서, 좀 더 있어도 될 것 같아요. 음...
[아인]
왜 그래? 하고 싶은 말 있는 것 같은데.
[나]
아인 선배, 한번 안아줄래요?
아인이 순간 멈칫했다.
[나]
저는 못 느끼지만, 제가 보는 것이 선배의 눈앞에 있는 그 아이가 보는 거고, 제가 하는 말이 선배의 눈앞에 있는 아이가 하는 말이니까요. 윽, 저한테도 저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녀석이 있네요.
예전에 그가 마음이 복잡할 때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은 순간 그런 핑계를 낸 적이 있었다. 그건 아주아주 먼 옛날...시간마저 바래질 만큼 먼 옛날이었다. 그들이 아지트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며 게임팩을 섭렵하고, 수많은 디저트를 먹던 시절이었다.
[아인]
다른 녀석을 앞세워서 말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닌데.
[나]
선배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요.
[아인]
맞아, 내가 먼저 시작한 거야. 한번 안아보자.
온기라곤 없는 포옹. 무의미한 코드로 이루어진 고철. 하지만 기계가 만들어낸 코드는 다리가 되어 그와 그녀를 만나게 해주었고, 미래를 꿈꾸게 해주었다.
[나]
선배, 선배 머리카락이 보여요.
[아인]
...머리카락이 왜?
[나]
등도 보여요. 선배의 방이랑 선배의 삶의 흔적도, 선배의 게임도, 선배의 해킹 기술도 보여요.
[아인]
응. 나 여기 있어. 나도 네가 있는 곳을 보고 싶어... 실제로 보면 화가 나겠지만.
[나]
선배의 화난 모습이 보고 싶네요.
[아인]
좋아, 나중에 만나면 보여줄게.
[나]
.....
[아인]
왜 그래?
[나]
......
아인이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다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를 '아인'이라고 부르는 이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아인]
......
아인은 소녀가 떠났음을 깨달았다. 경계 밖 손님의 감시가 시작된 것이다. 가상 시계는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전생에서 패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지났다. 대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인]
...곧 보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