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꼭두각시

2024. 3. 6. 23:21각성의 장/용성 편 (아인)

 문밖에 필쳐진 풍경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대도시의 풍경이었다. 고층 건물과 차량, 거리는 여태껏 본 적 없는 형태로 여기저기 뻗어 나가 현란한 모습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 달리,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천천히 수분을 잃어가는 환자처럼 눈에 초점을 읾은 재 그곳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회색 안개에 뒤덮인 이 유령 도시를 보니... 순간, 이 도시는 죽어가는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회장님, 회장님! 

 

 비행선에 탑승하려던 아인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을 본 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나?]

쫓아낼까요?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다섯 손가락이 새카만 총구로 변했다! 아니,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팔꿈치에도 미세한 이음새가 보였다. 이곳의 '나'는... 전투용 꼭두각시 같은 건기? 

 

[아인]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지. 

 아인이 소녀의 손을 지그시 누르자, 총구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능숙한 그의 동작을 보니,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았다. 

 

[???]

하아, 하아... 회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인의 앞까지 달려온 남자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아침을 떨기 시작했다. 

 

[아인]

제 기억이 맞다면, 새해가 되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을 덴데. 서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뒷짐진 아인의 모습은 상당히 느긋해 보였지만, 그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서훈]

회장님, 일전에 지상 분들께서 나무라신 건 저희 쪽에서...

 

[아인]

서훈, 당신이 저지른 짓을 지금 나더러 처리해달라고 하는 겁니까? 

 

 웃음을 거두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아인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회장이라는 칭호. 그리고 아인과 꼭두각시 소녀의 복장...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분명 아인은 이곳에서 높은 직위를 자지한 인물일 것이다. 

 

[서훈]

회장님... 제가 잠깐 어떻게 됐던 모양입니다. 이런 실수는 절대로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인]

실수라? 서 사장님, 인류가 패배하고 용의 도시로 밀려난 이후로 당신이 실수하지 않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인이 웃었다. 

 

[아인]

지난달 회의 기록을 서 사장님에게 보여드려. 

 

['나']

네.

 

소녀가 손을 필기 화면을 띄우자, 화면 위로 데이터가 빠르게 떠올랐다. 

 

 

용성 그룹 회의, 7구역 책임자 서훈.

 

[아인]

굵직한 것만 뽑아서 내보내. 

 

[서훈]

회, 회장님... 이게 무슨...

 

[회의 기록 속 서훈]

시대의 흐름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경계 밖 손님에게 패배했습니다. 살고 싶다면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서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아인]

서 사장님, 말씀 한번 잘하셨군요. 살고 싶다면 경계 밖 손님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라. 그런데도 당신은 감정의 힘을 빼돌리셨더군요. 딱히 쓸 데도 없을뿐더러, 경계 밖 손님의 이익도 침해했죠. 

 

['나']

용의 도시와 지상의 약속 제 54조: 감정의 힘을 개인이 소장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서훈]

사, 사형이라니!? 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나']

경계 밖 손님께서 담화 시 정한 규정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재단의 책임자도 이 규정을 어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셨던 거겠죠. 

 

 식은땀을 홀리던 서훈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소녀는 시종일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인 이 작게 웃은 것 같은데? 

 

[서훈]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용의 도시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반하다니! 전 죽어 마땅합니다! 

 

[아인]

용의 도시에 베푼 은혜를 비방했다? 드디어 저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나']

용의 도시와 지상의 분쟁이 발생하면, 회장님께선 용의 도시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서훈, 당신은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죠. 당신을 용서할 이유 는 없습니다. 

 

 아인은 가법게 웃었고, 소녀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실어 내뱉었다. 서훈은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목숨을 구걸할 뿐이었다. 

 

[서훈]

회장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분들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목숨만 부지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장관님도 회장님도 모두 자비로우신 분들이 아닙니까! 

 

 ...장관님? 저 기계 소녀가 그저 인형이라면, 서훈의 입에서 나온 장관이야말로 진짜 미래의 나인 건가? 

 

[아인]

그녀는 여기 없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군요. 

 

 아인의 말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설마... 미래의 나는 여기 없는 건가?! 

 

[서훈]

장관님만이 인간을 대표해 경계 밖 손님들과 담화를 나누실 수 있지 않습니 까! 그런 장관님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회장님께서...

 

[아인]

그만.

 

 아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눈을 내리깔자, 붉은 눈동자에 감춰진 감정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인]

단지 나와 그녀의 '선심'에 기대 부탁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라면...

 

['나']

회장님, 뭔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경고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나']

에너지 파동 확인 결과, 전투형 로봇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서훈]

무슨!? 회, 회장님! 이건 저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 니까! 

 

[아인]

어디서 보낸 건지 확인 가능한가? 

 

['나']

장비 모델로 봤을 때 음룡회에서 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훈]

음룡회라니!? 회장님, 전 회장님과 경계 밖 손님을 배신하려는 놈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아인은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는 서훈을 무시한 재 소녀의 앞에 섰다. 

 

[아인]

음룡회라. 탄환 낭비나 하게 생겼군. 

 

['나']

섬멸할까요? 

 

[아인]

아니, 쓰러트리는 걸로 끝내. 

 

 아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 '내'가 그의 옆에 섰다. 무기의 붉은빛과 기계의 푸른 빛이 한데 모여, 작지만 밝은 빛을 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저들의 행동에,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해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인]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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