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춤

2024. 2. 11. 22:40에르세르 대륙(完)/아이리스의 장 (로샤)

 또다시 안개가 몰려왔다 걷혔다. 이번에는 황궁의 연회장이다. 

[로샤]

짐과 한 곡 추지 않겠나? 반려자가 될 이에게 춤을 청하는 건 이쪽의 전통이거든. 혹여 그대가 불민해 춤추는 법을 모른다 해도 괜찮다. 짐이 리드할 테니 걱정 말거라. 그 자그마한 발로 짐의 발을 밟더라도 화는 내지 않겠다. 그렇다고 일부러 밟지는 말고. 짐의 인내심은 그리 좋지 못하거든. 

 

어, 잠깐...? 몸이 움직여지네? 로샤가 내게 춤을 청하고 있었다. 겪어봤던 상황이다. 지난번 에르세르로 소환됐던 때와 같은 시간대인 듯하다. 

 

[로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신랑을 눈앞에 두고서 넋 놓고 있으면 쓰나. 

 

그 소리에 정신이 번씩 들었다. 그래, 나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해. 

 

>폐하는 춤을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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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샤]

그렇게 놀라지? 에르세르의 황족은 어린 시절부터 춤추는 법을 배운다. 

 

[나]

춤은 능숙하실지 몰라도 표정 감추는 데는 서투르신가 봐요. 얼굴에 지루하다고 그대로 쓰여 있어요. 아까 춤추는 사람들을 세상 다 산 얼굴로 쳐다보시 던걸요. 

 

[로샤]

하! 역시 제법이야. 그대도 춤은 별로인 듯하니, 바람이나 쐴까? 짐이 친히 에스코트하지. 

 

로샤는 내 손을 잡고서 우아한 동작으로 플로어를 한 바위 돌았다. 곧 우리는 비교적 한산한 출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로샤]

발밑이 어두우니 조심해. 

 

 로샤는 계단을 다 올라갈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이끌어주었다. 이윽고 도작한 곳은 황궁 최상층의 테라스였다. 

 

-

 

 바깥 공기는 제법 싸늘하지만 상쾌했고, 맑은 밤하늘과 아름다운 야경이 손에 잡힐 듯 필쳐져 있었다. 저 멀리, 황궁 밖의 거리도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마차와 행인들이 한가롭게 오가고 있었다. 

 

[로샤]

또 넋을 놓으셨군. 그 정도로 짐의 매력이 형편없진 않을 덴데.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별 구경을 좋아하나 보군. 짐은 하늘보다는 대지를 살펴보는 일이 더 많지. 짐의 백성들이 머무는 곳이니까. 저긴 황성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길인 랑셀 거리다. 저 건물 뒤쪽의 작은 골목은 플라워 거리. 봄이 되면 집집마다 테라스에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장관을 이루곤 했었지. 

 

 로샤는 여기저기를 가리카며 내게 황성의 거리를 소개해주었다. 위엄 있는 목소리엔 변함이 없었지만, 로샤는 어던지 모르게 천진해 보였다. 폭군의 악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순간, 등 뒤로 거센바람이 불어닥겠다. 명백한 살기에 돌아보기도 전, 로샤는 나를 붙잡고 재빨리 움직였다. 언제 잠입했는지 모르는 수상한 자들이 흉기를 들고 서 있었다. 반란군 자객? 

 

[로샤]

기별도 없이 감히 황제를 독대하려 하다니. 도통 예의라곤 없는 놈들이군. 

 

 로샤는 씩 웃더니 갑자기 테라스 측면의 벽으로 나를 밀겠다. 세게 떠밀려 들어간 곳은 거기 있는 줄 전혀 몰랐던 비밀 통로였다. 

 

 

>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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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1. 윤회

 

 나는 로샤가 내민 손을 잡고 기꺼이 춤에 응했다. 그의 리드에 따라 플로어를 도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 후, 로사를 따라 방으로 돌아간 나는 거기서... 카이로스와 알카이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게 꼭 운명에 조종당하는 기분이 었다. 나는 끝내 황궁을 탈출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

 

 월계절은 돌아왔고, 나는 영락없는 제물 신세로 황성의 중앙광장에 끌려갔다. 

 

[로샤]

미안하군. 이것은 그대와 나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강림 마법진으로 떠밀려 들어간 내 주위로 푸른빛이 솟구쳤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물이 되는 것으로 이 강림의식은 과연 성공할까? 글쎄, 모르겠다. 나는 결말을 볼 수 없게 됐으니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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