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비밀

2024. 1. 23. 23:33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창문의 휘장 사이로 강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

벌써 아침이라니...

 

-

 

서둘러 씻고 몸단장한 뒤 밖을 내다보니 복도가 텅 비어 있다. 호위에 만전을 기한다더니 왜 아무도 없대? 

 

[아인]

찾고 있는 거라도 있나? 

 

 아인이었다. 아인은 또다시 화려한 귀족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황궁 안에서는 이런 복장이 집행인의 검은 망토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아인은 어울리지 않게 어색해했다. 

 

[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아인]

표면적으론 호위, 실질적으론 감시. 계획이 틀어지는 건 질색이라서.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의 말투에는 이미 어느 정도 적응됐기에 그냥 핵심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

 

 도작해보니 회랑 끝자락의 작은 정원이었다. 정원 한쪽엔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째 지키는게 아니라 돌봐지는 느낌인데?

 

[아인]

너를 감시하던 마법사. 그 알카이드라는 작자 말인데. 마탑에서 임무 소홀에 대한 죄를 묻지 않고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미리 알려두겠지만, 저쪽에 허점이 생겨 너를 처벌할 충분한 증거를 찾는다면. 나는 명령을 받들어 너를 체포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말은 딱히 신경씌이지 않았다. 알카이드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깐.

 

[나]

그래서, 알카이드는 괜찮대요? 다진 데는 없죠? 

 

 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하단 얼굴로 빈정거렸다. 

 

[아인]

그자에게 꽤나 신경이 쓰이나 보군. 눈물이 날 지경이야. 명심해. 다음엔 절대로 봐주지 않아. 시시한 놈에겐 동정심따위 품지 마. 

 

그는 한 걸음 다가와 느긋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인]

나는 너를 돕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너를 이용하는 것뿐이지. 그러니 네 이용 가치를 잃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난 그녀석에게 절대 지고싶지 않거든. 잊지마. 네가 내 약을 마셨다는 걸.

 

[나]

알카이드는 우리 일과 아무 관련도 없어요. 죄가 없다고요 

 

아인은 무섭도록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아인]

죄 없는 마법사는 없어. 마법사만이 아니야. 이 황궁 안에 순결한 자는 단 한 놈도 없다. 그게 짐승일 지라도.

 

 짧은 한마디에는 경멸, 혐오, 증오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들끓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깊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

아인은 황족이잖아요. 어째서 그런 소릴...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그의 품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아인은 날이 시퍼렇게 선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인]

주제넘는 관심은 사절이야. 멋대로 날 판단하겠다고? 건방지군. 년 로샤를 상대하기 위한 도구라는 걸 잊었나. 알 필요 없는 것에 대해 알려고 들지 마라.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내가 알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선 의문도 느끼지 마. 

 

 팔걸이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킨 그는 그제야 한 발 물러섰다. 

 

[아인]

저녁에 다시 오지. 내가 없는 사이 허튼짓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

아인...

 

[아인]

나는 네가 누굴 구하던 알 바 아니지만, 네가 동정을 베푸는 상대가 되어주는 건 사절이거든.

 

 아인은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물끄러미 식탁을 내려다보는데 식욕 따위 날 리가 없다. 

 

-

 

 그새 황후 침전 주변에는 집행인 부대 소속 호위병들이 쫙 깔려 있었다. 위압적인 분위기 탓에 절로 위축되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아인의 신뢰를 얻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할 듯 싶다.

 아인은 황궁의 모두를 불신하는 모양이다. 그건 아마도 그가 외톨이였던 이유 중 하나겠지. 그의 세계는 오직 그만의 것.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은 재 견고하게 지켜왔을 터.  

 

-

 

 오전 내내 갇혀 있느라 답답해진 나는 정원을 가법게 산책했다. 햇살을 만끽하던 중, 우연히 대화 소리를 들었다. 

 

[귀부인]

아침에 아인 황자님께서 황궁에 들르셨더군요. 

 

황자님...이라니? 아인은 로사의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인데? 

 

[귀부인]

어쩜 그리 선황 폐하와 퓨에나 황후 폐하를 쪽 빼닮았는지... 정말 잘생기셨더군요.

 

[중년 귀족]

아인 황자님께서 황궁에? 오랜만이로군. 집행인 부대 지휘를 맡은 뒤로는 귀족모임에 거의 발을 끊다시피 하셨으니깐. 아무튼, 아인 황자님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인이 선황과 황후의 적자라면, 아인이 황제여야 하잖아. 어째서 아인의 사촌형 이라던 로샤가 황좌를 차지하고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쩌면 로샤가 황좌를 찬탈했는지도. 그것이라면 두 사람 사이의 불화도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또 앞뒤가 안 맞는다. 아인에게서 황위를 빼앗았으면서 도로 황태자에 앉히다니.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귀족 여인이 날 발견하고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귀부인]

쉿. 그만 가시죠.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고, 나도 아무런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방문 앞엔 어김없이 섬뜩한 도끼를 차고 있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감시당하고 위협받는 현실에 새삼 가슴이 답답해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명색이 황제의 '예비 신부'인데 말동무 하나 안 붙여주다니. 무료해진 나는 이리저리 방을 뒤져보았다. 그러다 화장대 서랍에서 수상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검술 관련 서적이라니, 보통 황후의 화장대에서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아인은 검술이 뛰어났지... 이 방은 당연히 로샤의 어머니가 쓰던 공간이라 생각했건만. 

 정원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방의 원 주인은 아인의 모친인 퓨에나 선대 황후인 모양이다. 아인은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아름다운 외모뿐 아니라 훌륭한 검술도 물려받았나 보다. 

 선대 황후는 이 책을 매우 좋아했는지, 책 곳곳에 메모가 남아 있었다. 책갈피도 여러 개 꽂혀 있었다. 나는 그러한 부분들을 찾아 꼼꼼히 읽어보았다. 책에는 공격뿐 아니라 유용한 회피 기술도 소개되어 있어,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비밀 조력자를 얻은 기분이다. 책에 흠뻑 빠져든 덕분에 정신을 차려보니 오후가 다 지나가있었다. 

 

[아인]

뭘 그렇게 보고 있지? 

 

 언제 왔는지, 아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들고 있는 책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드리위졌다. 

 

[나]

아아, 서랍에서 찾았어요.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아인]

감상은? 

 

나는 화장대에 조심스럽게 책을 내려놓았다. 

 

[나]

굉장한 책이었어요. 그리고 이 책의 주인이셨던 분은 분명 세심하고 열정적인, 검술의 대가였을 거예요. 

 

아인은 희미한 미소를 피더니 화제를 돌렸다. 

 

[아인]

대단한 학구파가 나셨군. 그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삼가도록. 

 

아인이 부르자 시녀들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하녀]

저녁식사입니다. 

 

 카트에는 메인 요리는 물론 과일과 달콤한 디저트까지 올라 있었다. 시녀들이 식사를 차려주고 자리를 뜬 후, 아인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배가 고픈가? 아인은 이 방에 익숙해 보였다. 이곳이 그의 모친의 거처였다는 확신은 더욱 짙어졌다. 아인은 스테이크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주었다. 

 

[아인]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할 정도로 형편없지 않은 것뿐이야. 이런 생활 감각 정도는 있다고. 

 

 내가 가법게 감사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자, 그는 화장대로 걸어가 책을 뒤적였다. 그는 애틋한 손길로 책 위의 필적을 어루만졌다. 저렇게 부드러운 모습은 처음이라 무적이나 낮설게 느껴졌다. 그는 책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인]

오늘 낮엔 생각을 좀 정리했다. 네 말이 맞아. 비록 목숨을 맡아두고 있다곤 해도, 너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네게서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렵겠지. 아침엔 쓸데없는 일로 내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 네게 저질렀던 무례에 대해선 정중히 사과하...

 

내게로 고개를 돌리던 아인이 일순 멈칫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인]

너 설마...! 그 디저트를 혼자서 다 먹을 셈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지었다.

 

[나]

아, 아니에요! 내가 단것에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무슨...! 

 

그 소리에 제 발 저렸는지, 아인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는 내 앞에 늘어서 있는 케이크와 푸딩을 아인 쪽으로 살며시 밀며 함께 들기를 권했다. 

 

[아인]

또 이런 수법으로 나를 매수하려고?

 

[나]

그런 셈이죠. 쓸모가 있나요?

 

그는 어색한 얼굴로 케이크를 먹었다. 

 

[아인]

아슬아슬하게 함격점이라고 해두지.

 

[나]

참 까다롭네요...

 

 아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보며 뭔가 말하려는 기색에, 나는 얼른 다른 디저트를 들이밀었다. 

 

[나]

모르겠으면 더 먹어봐요! 성에 잘 때까지! 

 

 아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나는 조금 붉어진 귓불을 놓치지 않았다. 이 냉혹한 남자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인이 내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상처는 마법 덕에 거의 다 나았는데, 칭칭 감겨 있는 붕대가 신경 쓰이나 보다. 

 

[아인]

손 내밀어봐.

 

 내 손을 잡고 살펴본 아인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인]

아주 제멋대로 해놨군. 

 

 아인은 재빠르게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핀 뒤 다시 감아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솜씨 였다. 그는 누굴 이렇게 돌봐줬을까? 부하들? 아니면 자기 자신? 탄탄하게 묶인 붕대의 매듭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

리본?

 

 아인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나]

붕대 잘 맸다고 칭찬한 거에요.

 

[아인]

별말씀을.

 

돌아가신 모친의 방이기 때문일까, 아인의 표정도 목소리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며 나는 아인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어떤 아이였을까? 아인은 허공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인]

나는 마법사들의 치료는 믿지 않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으니 제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싸우게 되거든 내가 알던 사람도 그러다가 결국... 겉보기엔 멀쩡해도, 괜찮을 리 없잖아 마법사들의 치료 따위 기댈게 못 돼. 평범하더라도 진실한 것을 믿어야지. 

 

 나는 붕대가 감긴 손을 들어 아인의 손등에 올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

아인, 우리 이제 그만 싸워요. 

 

뜬금없는 소리에 아인은 미간을 좁혔다. 

 

[아인]

무슨 의미지? 

 

[나]

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그러니 방어한답시고 날 선 소리만 골라 하다 서로 감정이 상하기도 했죠. 아인이 나를 인형이라고 불렀을 때 내가 욱해서 장난감 병정 운운하며 받아졌던 것처럼 말이에요. 

 

아인은 내 하소연을 들을 준비가 된 듯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

당신이 로샤를 어떻게 생각하는진 정확히 모르지만... 

 

 로샤의 이름이 나온 순간, 돌연 그는 제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기척도 없이 신속한 동작으로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아인이 해명했다. 

 

[아인]

엿듣는 자가 있을까 확인했을 뿐이야. 

 

[나]

...내가 로샤 이야길 해서 인가요? 

 

잠시 갈등하던 아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인]

그래. 조금은 더 많이 알아두는 것도 좋겠지. 나와 로샤의 관계, 그리고 그놈이 저지른 짓을. 이 황궁은 고상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 쓰레기장만도 못한 곳이야. 때가 오면 전부 알려주지. 내가 직접. 

 

 짙은 그림자가 드리위진 아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엔 모르는 게 나은 일들이 있다. 알고 나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일들 말이다. 

 

[나]

그런 걸 말해줘도 괜찮겠어요? 

 

아인은 내 턱을 잡아 그를 똑바로 바라보게끔 했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아인]

아쉽게도 이미 늦었어. 잊지마. 시작하는 것도 나, 끝내는 것도 오직 나뿐이라는 걸.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나를 옥죄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 채.

 

[아인]

멍청한 도구는 필요 없어. 그러니 똑똑한 공범이 되도록, 내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 그러면 나는... 네게 더 많은 것을 나눠줄 거야.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아주 은밀한 것까지도.

 

 아인은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내 입술을 쓸었다. 부드럽고도 유혹적인 손길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아인]

입가에 음식을 묻히면서 먹다니, 우아한 레이디까지는 못 되는군. 

 

 아인은 잼이 묻은 손가락을 내 눈앞에다 짓궂게 흔들어 보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

점심에 먹으려고 남겨둔 거예요. 

 

웃음을 참는 듯, 아인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아인]

그럼 내일 보자고. 

 

[나]

그러고 보니 우리, 사흘보다 훨씬 더 자주 보네요. 

 

그 소리에 아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툭 내뱉었다. 

 

[아인]

너한테는 잘된 일 아닌가? 

 

 그가 떠난 공간이 왠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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