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시 황궁으로

2024. 1. 23. 13:00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황궁에 도착한 아인은 내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비밀스럽게 하나로 겹친 그림자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인기척이라곤 없었는데,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카이로스]

집행인 부대 사령관과 이세계 신녀라니, 다소 의외의 조합이군요.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인]

얼마든지 답해드리지, 대마법사 카이로스. 

 

 집행인 부대 사령관과 마탑 수장의 대치에 주변 공기마저 서늘해졌다. 황족이라 그런지, 아인은 카이로스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아인]

성 밖에서 반란군이 일으킨 소동에 이 여자가 휘말린 걸 우연히 발견했다.형님의 약혼녀라기에, 상처를 치료하고 황궁으로 호위하는 길이지. 마탑 9성 중 하나가 이 여자를 근접 호위 중이었다던데...

 

아인은 카이로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아인]

전투 중에 줄행랑을 치고 잠적한 그자가 심지어 대마법사의 애제자라지? 

 

 카이로스는 오금이 저릴 만큼 예리한 눈빛으로 아인을 응시했지만 아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카이로스]

묘한 이야기 천지로군요. 다른 사람도 아닌 알카이드가 전투 중에 도망쳤다는 것도, 그리고 전하께서 마침 딱 그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아인]

반란군 제압은 집행인 부대의 임무다. 내가 내 일을 수행하는 게 무엇이 묘하지? 그런 소릴 내놓기 전에 마탑은 마탑의 본분부터 충실히 하시길. 오늘 일로 황제의 약혼녀에 대한 마탑의 입장을 잘 알았다. 손에 피를 묻혀본 적 없기 때문인가, 대마법사께선 참으로 태평하시군. 부러울 지경이야. 

 

[카이로스]

그저 상황을 확인하려는 것뿐,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카이로스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 왔다. 얇은 안경알 너머 그의 눈동자는 냉기만 가득했다. 

 

[카이로스]

손바닥의 자상이라... 방어흔치곤 너무 깔끔하군요. 공격한 반란군이 상당히 우호적이었나 봅니다?

 

[나]

!!!

 

 언제 내 상처까지 확인한 걸까. 그의 타당한 의심에 등골이 오싹하고 입술은 바짝 말라붙어버렸다. 카이로스의 짙푸른 눈은 다시 아인에게로 향했다.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해 숨이 막혔다. 그때, 점잖은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구세주는 바로 로샤였다. 

 

[로샤]

카이로스 경, 어렵게 모서온 짐의 신부를 괴롭히지 마시게. 

 

[카이로스]

......

 

[로샤]

겁에 잔뜩 질려 있군. 가없기도 하지. 

 

 분명 나에게 한 말이지만, 로샤의 눈은 아인을 향해 있었다. 사촌형제라곤 하나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 분위기까지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다. 후계자이자 하나뿐인 사촌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은 황제라니.

 로샤를 마주한 아인의 붉은 눈에 언뜻 살기가 스쳤다. 아인은... 로샤를 증오하는 걸까. 로샤는 아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카이로스를 돌아보았다. 

 

[로샤]

듣자 하니 경의 부하가 호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모양이군. 어떻게 된 일이지? 

 

[카이로스]

내막이야 어떻든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변명은 않겠습니다. 대신 다른 마법사를...

 

[로샤]

아니. 이 시간부로 신부의 호위는 아인에게 일임하겠으니, 마탑은 손을 떼시게. 

 

 전혀 의외였다. 아니, 물론 내게는 유리한 상황이지만, 일이 너무도 수월하게 흘러가니 당황스러울 정도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인은 예를 갖추어 명을 받들었고, 카이로스는 얼어붙을 것만 같은 냉기를 뿜어냈다. 

 

[카이로스]

폐하, 장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희의 맹약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카이로스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로샤는 회의장으로 향하며 나와 아인에게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아인]

가지.

 

 아인이 앞장섰고,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발을 뗐다. 긴장을 풀기 위해 주머니 속에 있는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

 

 나와 아인은 로샤 앞에 나란히 섰다. 아인은 로샤에게 오늘 일을 보고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에도 그의 설명엔 도무지 빈틈이라곤 없었다. 로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띈 채 귀를 기울였다. 

 

[로샤]

내 약혼녀를 구해주어 고맙다, 아인. 너는 어제 약혼식에 오지 않은 것 같던데, 두 사람은 초면이겠군. 

 

[아인]

그렇습니다.

 

 아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거짓말쟁이. 

 

[로샤]

나의 예비 신부를 본 감상은 어떤가. 눈이 부시게 예쁘지 않나? 

 

[아인]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아인의 음성은 더없이 단호했다. 그가 로샤 앞에서 하는 모든 말은 철벽을 쌓는 것처럼 들렸다. 

 

[로샤]

흐음. 너무 진지하니 재미없는데. 

 

[아인]

맡은 바를 다할 뿐입니다.

 

아인은 흔들림 없는 곧은 눈으로 로샤를 바라봤다. 

 

[로샤]

아인. 네가 내 약혼자를 마음에 두었다 한들, 내가 어찌 화를 낼 수 있겠나. 너는 나의 유일한 후계자인데.  안그런가?

 

화살이 이번엔 나를 향했다. 

 

[나]

저런 분이 저를 마음에 둔다면 매일 밤 머리가 제자리에 잘 붙어 있는지 더듬어보며 잠들어야 하겠지요. 

 

 나는 아인의 도끼를 슬쩍 곁눈질했다. 아무리 무기라 해도 어쩜 저렇게 무시무시할까. 주인의 우아한 분위기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졌잖나. 

 그건 그렇고, 로샤가 하는 말을 들으며 새삼 내 처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저 인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가차 없이 버려질 도구 말이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로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만에 웃음소리가 멎고 사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로샤]

장난은 이쯤 하도록 하지. 아인. 짐의 신부를 처소로 데려다줘라. 

 

로샤는 아인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인]

폐하. 신녀님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호위를 충원하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로샤]

부상이 심각하지 않은 것을 보면 딱히 큰 소동도 아니었던 것 같구나. 너를 믿는다. 전적으로 네게 맡기지. 

 

아인은 표정 변화 없이 꼿꼿이 선 채 말을 이었다. 

 

[아인]

다른 분부는 없으신지요. 

 

[로샤]

분부는 됐고, 조언이나 한마디 하지. 레이디를 대할 때는 좀 더 부드러워지는 게 좋을 거다. 카이로스 경도 너도 어찌 그리 뻣뻣한지. 

 

 로샤는 아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서 자리를 떴다. 

 

-

 

 나는 아인을 따라 황후의 침전으로 이동했다. 아인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아인]

다왔군. 되도록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거다. 

 

[나]

알고 있어요. 

 

 로샤와 카이로스가 의심을 품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인은 긴장한 날 내려다보더니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따뜻한 그의 숨결이 닿은 귓불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인]

뱃지는 반드시 지니고 다니도록. 오늘 일로 너는 로샤와 카이로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어. 번거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없는 곳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배지를 보여주면 도움이 될 거다. 그렇다고 큰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기억해. 만약 네가 내 권한 밖에서 일을 벌인다면, 난 널 구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아인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무슨 일인지,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를 붙잡기 위해 나는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막 던졌다. 

 

[나]

아인, 도대체 제가 어떻게 생겼다는 거예요?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아인이 눈썹을 밀어올렸다. 

 

[나]

어제 연회에서 그랬잖아요, "이렇게..."

 

 아인은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때 말한 "이렇게 생겼군"이라는 말을 던지며 내 말을 끊었다. 

 

[아인]

'그런 얼굴'의 뜻을 묻는 거라면,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아닐걸. 왕좌에 앉은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

뭐, 뭐라고요? 하, 참 나! 

 

나는 문을 쾅 닫아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문틈으로 손을 뻗어 내 행동을 저지했다. 

 

[나]

왜요! '이런 얼굴에 아직 볼일이 남았나요!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인]

이제부터 머리가 제자리에 붙어 있는지 잘 확인해봐. 

 

[나]

네?

 

[아인]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내가 널 마음에 두었다면 그럴 거라고. 매시간, 머리가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바쁘겠군. 

 

 아인은 알쏭달쏭한 한마디를 남긴 후 돌아섰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한 거야? 

 

-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그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후, 황궁의 시녀가 붕대와 수상한 약을 가지고 왔다. 

 

[나]

이게,,, 뭐죠? 

 

[시녀]

아인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신녀님의 상처를 치료해드리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나]

이건 먹는 약이에요? 

 

아인은 이미 내게 알 수 없는 성분의 약을 먹였다. 설마 또? 

 

[시녀]

약이 아니고, 진정 효과를 가진 차입니다. 오늘 신녀님께서 많은 일을 겪어 긴장했을 터라 잠자리가 불편할 수 있다셨습니다. 

 

 잘 자라고 살뜰히 챙겨주기까지 하다니. 얼떨떨한 채로 차를 음미했다. 보낸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차는 효과를 발하지 못했다. 아인과의 거래,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던지시 던진 말을 곱씹느라 나는 동들 무렵이 되어서야 지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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