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동맹

2024. 1. 23. 12:52에르세르 대륙(完)/분쟁의 장 (아인)

 신뢰를 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환된 내 그림 소울은 아인이 보는 앞에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 최강의 무기이자 최후의 비밀을 다 내보인 것이다. 내가 지면 아인은 나를 로샤와 카이로스에게 넘길 것이다. 하지만 이긴다면 희망은 있다. 

 

[나]

내가 이겼으니 내 제안을 받아들여줘요. 

 

[아인]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성격이 급하군.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망토 자락을 휘날렸다. 그가 내던진 도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 무시무시한 검광이 번뜩였다. 뭐야! 숨겨둔 무기가 있었어?! 

 

-

 목덜미에 닿은 검신을 통해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해졌다. 결코 겁을 주기 위해서 떠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살기.

 

[아인]

잘도 떠들더니, 이제야 입을 다무는군.

 

나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내가 졌어요.

 

[아인]

상황 파악이 빠른 건 칭찬해주지.

 

 나는 아인의 검을 슬쩍 내려다봤다. 엷고 긴 검신에 화려한 루비가 박혀있는 검은 전투용 무기라기보다는 행사용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검으로도 내 모든 방어를 뚫고서 급소를 겨눈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내 목숨을 거둘 생각은 없나보다.

검을 물린 아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인]

너는 내게 그저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야. 위험한 존재지. 그러니 오늘 일을 로샤에게 낱낱이 보고해야 맞지만...

 

 말끝을 흐리는 아인의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이 피어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망토 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병 안에는 붉은빛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아인]

마셔.

 

 아인의 표정은 무섭도록 진지했다.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겠지. 공병을 다시 아인에게 던지자, 그는 가법게 잡았다. 빈 약병을 던져주자 그는 가법게 잡아채며 빈정거렸다. 

 

[아인]

만사태평이시군. 뭔지도 모를 걸 단숨에 마서버리다니.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나]

날 통제하려는 수단이겠죠. 혹시, 독약인가요? 

 

 담담한 내 반응이 다소 황당했던지, 그는 코웃음을 쳤다. 

 

[아인]

죽진 않을 테니 안심해. 다만, 사흘마다 필요한 약을 먹지 않으면 꽤나 고통스러울걸. 

 

결국 독약이란 소리잖아. 

 

[나]

협력자로서 받아들여주긴 하지만 허튼짓은 불허, 그리고 정보 교환 주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는다. 맞죠? 

 

[아인]

보기보다 멍청하지는 않군. 

 

[나]

칭찬 고맙네요. 자, 이제 제 목숨은 당신 거예요. 이제는 제가 조건을 제시할 차례이니 잘 들으세요. 

 

 아인은 한 발 물러나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왠지 은밀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아인]

마찬가지가 아니지. 너는 이제 온전히 내 것이다. 

 

 으음,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인데. 

 

[나]

나는 얼음 나비의 비밀을 조사하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은 황궁 밖에서 내 눈이 되어쥐요. 

 

[아인]

내가 변덕을 부려 네 음모를 고발할지도 모른단 생각은 안 해봤나? 

 

[나]

그 말 그대로 본인에게 돌아갈 덴데요. 감히 황제의 신부를 성 밖에서 몰래 만난 데다, 중요한 제물을 독살하려 하고 있잖아요? 아인. 내게 독약을 먹임으로써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요. 당신도 나한테 똑같이 약점 잡힌 거예요. 

 

 아인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 이었다. 별종이라도 본 얼굴이다.

 

[나]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먼저 내 의지와 신의를 증명했으니, 이젠 당신 차례예요. 내게도 보험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아인은 피식 웃더니 망토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내게 건넨 것은 금색 체인과 붉은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펜던트였는데, 굉장히 정교하고 묵직했다. 

 

[나]

아주 귀해 보이는 물건이네요. 

 

[아인]

쓸모없는 장식품이긴 하지만, 유사시엔 그걸로 날 증명할 수 있을 거다. 

 

[나]

이게 뭔데요? 

 

그는 더러운 쓰레기라도 대하는 눈으로 펜던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인]

고.귀.한. 황실 구성원만이 가질 수 있는 배지. 정식으로 소개할까. 나는 황제의 사촌동생이자 에르세르의 유일무이한 황태자다. 다시 말해, 내가 황위에 오를 방법은 황제의 죽음밖에 없다는 뜻이지. 

 

 무척이나 위험한 발언을 하고도, 아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인]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 아닙니까, 형수님? 

 

 혼란스러웠다. 아인과 로샤의 관계가 좋지 않으리란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복잡한 모양이다. 아인은 왜 같은 핏줄인 로샤를 증오하는 걸까. 그리고 로샤는 어째서 귀한 후계자 아인에게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직책을 맡겼을까. 

 아인은 싸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인]

너,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리고 쓸데없는 정보를 핑계로 내 발목을 잡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길. 나는 언제든 널 버릴 수 있으니까. 

 

​나는 지지 않고서 맞받아쳤다. 

 

[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지만, 끝까지 버리진 않을게요.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그는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골목 저편을 눈짓했다. 

 

[아인]

헛소리는 그쯤 하고. 너와 동행하던 저 마법사를 슬슬 처리해야겠군. 좋아. 오늘 내가 널 만나게 된 건, 널 감시하던 저 고위 마법사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하지. 그 탓에 너는 빈민가에서 길을 잃고 혼자서 배회하다 괴한들에게 포위됐고, 그런 너를 내가 구해서 황궁까지 데려간 걸로. 마탑이 불명예를 안는 건 유감이지만, 황실 새 구성원의 안전을 고려해 집행인 부대는 기꺼이 호위무사 역할을 맡을 의향이 있다. 다 외웠나? 그대로 읊어봐. 

 

 아인의 시나리오는 완벽했다. 내게서 마탑의 감시를 떼어내고 나와의 접촉도 자연스럽게 이을 좋은 방법이다. 

 

[아인]

못 외우겠으면, 그냥 널 지켜주던 저 마법사가 갑자기 이성을 잃어 내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해.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하지. 

 

그렇지만, 알카이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인에게 있어 알카이드는 확실히 변수였다. 알카이드가 오늘 일을 얘기한다면, 우리는 대역최인이 될 테니까. 

 

[나]

당신은 당신 부하들 입단속에 힘써쥐요. 알카이드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인]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나? 

 

[나]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못 믿는 태도를 보인다면, 나는 아인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거예요. 

 

 아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발 물러서는 노력을 보였다. 

 

[아인]

충고 하나 해주지. 내게 했던 것처럼 저 마법사를 상대할 생각은 마. 모든 사람에게 그 수법이 먹힐 거라 생각지도 말고.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나는 정색하는 아인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적어도 한 명한테는 그 수법이 엄청 잘 먹혔는데 말이에요. 

 

 아인이 발끈할 것을 예상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

 

 나는 알카이드에게 다가갔다. 아인은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알카이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나]

알카이드, 오늘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이유는 묻지 말고, 제발 그래줘요. 부탁이에요.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그리고... 미안해요. 

 

 알카이드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뒷목을 내리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받은 알카이드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마침 지척은 폐가가 가득했다. 내가 알카이드를 붙들고 낑낑대자 아인이 부하들에게 지시해 알카이드를 안으로 옮겼다. 이것이 최선이다. 마탑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선 알카이드를 떼어내야 한다. 

 

[아인]

벌벌 떨기나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인걸. 하지만...

 별안간 무언가 번쩍하더니, 아인의 검끝이 알카이드의 목을 똑바로 노렸다. 

 

[나]

무슨 짓이에요! 내게 맡기기로 했잖아요! 

 

[아인]

마음이 바뀌었어.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 

 

 다급한 나머지,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달려들었다. 검날을 붙잡자 날카로운 통증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갈래갈래 퍼져나갔다.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뒤늦게 고통에 몸서리쳤다. 아인은 버럭 고함을 쳤다. 

 

[아인]

미쳤어? 맨손으로 검날을!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에도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나때문에 알카이드가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아인]

너란 여자는 정말이지...! 

 

 아인은 더 이상 화도 나지 않는 듯, 한층 부드러위진 어투로 내뱉었다. 

 

[아인]

놔. 

 

 내가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자, 그는 직접 내 손을 떼어낸 뒤 검을 물렸다. 

 

[아인]

문제가 생긴다면, 네가 책임지도록.

 

[나]

고마워요. 알카이드를 살려줘서. 

 

 아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을 힐끗 쳐다봤다. 

 

[아인]

빌어먹을 마법사들이 다른 세계에서 괴물을 데려왔군. 

 

[나]

괴물이라니. 내가 무서워요? 

 

 눈물도 안 날 만큼 아팠지만, 나는 지독한 통증을 애써 참아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인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인]

아니. 나도 만만치 않은 괴물이라.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진 뒤, 아인은 내 손을 살며시 잡아올려 상처를 훑어봤다. 

 

[아인]

지혈되도록 꽉 누르고 있어. 이 마법사 녀석은 내가 책임지고 목숨을 붙여두지. 그리고 이런 멍청한 짓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음엔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아인은 즉시 부하를 불러 알카이드를 안전하게 호송하도록 명령했다. 

 

[아인]

상처가 깊다. 치료해라. 

 

 집행인 부대에도 마법사가 소속돼 있구나. 그녀의 손끝에 모여든 마법의 빛이 내 상처로 옮겨졌다. 벌어진 채 쉴 새 없이 피를 토해내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치유되었다. 끔찍하던 통증도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나]

우와, 마법이란 굉장하군요. 

 

[아인]

절대적인 건 아니니 마법만 믿고 설치지는 말라고. 

 

마법사가 자리를 뜨자 아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인]

황궁으로 돌아간다. 이제부턴 얌전히 굴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아인과 나는 인적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걸어갔다. 대기 중인 마차에 오르려는데, 아인이 정중하게 에스코트해주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고상하고 우아한 그의 태도에선 황족의 품격이 배어나왔다. 

 아인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 내내 마주 앉아 있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할 말이 가득한 눈으로, 아인은 내 손을 곁눈질했다. 

 

[나]

이제 괜찮아요. 정말로.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그는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인]

집행인 부대가 하는 일에 대해 알아둬. 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마도. 알다시피, 나는 로샤가 직접 지목한 후계자이자 황제 직속 집행인 부대의 수장이지. 칙령 제1조, 살인자는 처형. 제2조, 배신자도 처형. 황위에 오른 로샤는 복잡한 옛 법전 조항들을 다 버리고 큼직한 것들만 골라 칙령으로 남겼다. 그 칙령들이 바로 우리 부대의 존재 이유지.

 칙령 제3조, 이성을 잃은 마법사, 처형. 마법사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이성을 잃을 징조가 보이는 즉시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이상하다. 로샤는 카이로스를 깊이 신뢰하는 것 같았고 황제와 마탑의 동맹은 공고해 보였다. 그런데 황제 직속 집행인 부대는 마법사들을 감시하고 심지어 처단까지 한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들의 전투력은 일반 병사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월하다. 그런 마법사의 감시와 처단이라면, 집행인 부대는 사실상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뜻이다. 로샤는 어째서 아인을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운 동시에 저토록 잔인하고 위험한 임무를 맡겼을까? 둘의 관계는 확실히 정상적인건 아닌듯 했다. 깊은 고민에 빠진 내 표정을 본 아인이 작게 웃었다. 

 

[아인]

나쁜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답이 안 나오지? 

 

나는 분해서 투덜거렸다. 

 

[나]

내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애초에 문제가 이상해요, 문제가. 

 

[아인]

그래.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옆모습에선 이유 모를 쓸쓸함이 엿보였다 왠지, 그가 지금껏 외톨이로 지내왔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세계에 홀로 떨어진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외톨이 신세다. 

 그의 검은 망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뜬금없이 웃음이 터졌다. 아인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

그 망토 말이에요. 아까 보니 그 안에서 별게 다 나오던데, 도대체 주머니가 얼마나 크기에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거예요? 

 

[아인]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보시든지. 

 

 아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망토 자락을 슬쩍 벌려 보였고, 나는 기겁해 손사래를 쳤다. 

 외톨이 둘이서 은밀한 동맹을 맺었다. 그럼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닌가. '우리'를 태운 마차는 빠르게 길 위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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