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귀환

2024. 1. 5. 22:14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우리는 마침내 중앙광장에 도착했다. 어둠을 헤치고 마법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호레스가 먼저 우리를 발견했다. 

 

-

 

 제대로 마주한 호레스의 마법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마지막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했다. 

 호레스는 독기 서린 마법을 맹릴히 퍼부었지만, 매번 알카이드의 빛에 막혀 무력화되었다. 전보다도 안정적인 알카이드의 실력에 호레스는 놀란 듯했다. 

 

[호레스]

마력 폭주 상태에서 회복한 사람은 처음 본다. 독한 자식...

 

알카이드는 내 앞을 막아서며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카이드]

기억하나요? 마법사는 욕망으로 태어난다고. 날 믿어요. 내가 그토록 거대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을 구하려는 마음에서였어요. 그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이겨내고 돌아온 것도,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였지요. 나의 기적도 운명도,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결코 당신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 이건 내 욕망이에요. 

 

이내 알카이드는 어딘가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곳엔 카이로스와 로샤가 서 있었다. 

 

[카이로스]

제 발로 이곳에 돌아오다니. 패기가 대단한 건지 미련한 건지. 

 

 카이로스의 차가운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막강한 상대를 마주하니 그러지 않으려 해도 두려움부터 일었다. 그러나 알카이드는 의연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고서 카이로스에게 예를 표했다. 알카이드는 내 지난 여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나를 제물로 바친다 해도, 변수가 생겨나 의식이 실패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재앙을 저지할 방법을 찾고 결과를 바꾸기 위해서 돌아온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카이로스는 내내 눈살을 찌푸린 채 꿰뚫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로스]

그렇다해도, 확신 없이 위험을 감수할 순 없지. 원래 계획대로 가는 것이 최선이다. 

 

융통성 없는 카이로스를 설득하는 게 가장 큰일이었다. 알카이드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알카이드]

예하, 제물의 희생 없이도 강림 의식을 치를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뭐라고...? 제물의 희생 없이 강림 의식을? 

 

[알카이드]

반란군을 성안으로 들이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 별을 띄우는 것입니다. 별의 계단으로 신민들을 올려 보내면, 그동안 지쳐 있던 사람들의 감정은 희망으로 점점 고조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품는 희망이라면 충분히 통로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알카이드다운 해법이었다.

 

 십만 명이나 되는 이들의 감정을 하나로 모으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들의 계획대로,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지 않는 한은 말이다. 알카이드는 완전히 반대방식으로 접근했다. 사람들의 감정을 한데 모으기 위해, 슬픔과 절망 대신 기쁨과 희망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반란군은 애초에 막다른 길로 내몰린 자들이다. 그 말은 곧, 누구보다도 희망이 절실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나는 눈을 그게 뜨고 알카이드를 바라봤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알카이드]

별의 계단에서 기뻐하던 당신을 떠올리다 착안했어요. 

 

그러나 카이로스는 무표정했다. 

 

[카이로스]

뜬구름 잡는 소리다. 고작 그런 것에 인간의 감정이 크게 동할 리 없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다. 도박은 하지 않겠다. 

 

[알카이드]

시도라도 해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어차피 저희는 이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알카이드는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완강했다.

 

[알카이드]

스승님께선 저와 설린을 통해서 아셨을겁니다. 마법이 꼭 탐욕과 악의를 통해서만 발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고 성장시켜주신 것은, 제게서 뭔가를 보셨기 때문이 아닌가요? 저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빛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가장 아끼는 이를 위해 별빛이 되고싶습니다.

 

카이로스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알카이드의 말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로샤가 카이로스에게 넌지시 말했다. 

 

[로샤]

카이로스 경, 시도는 해보는 게 어떤가. 

 

[카이로스]

......

 

[로샤]

모든 마법사들에게 대비하라 일러두면, 성문이 열려도 상황은 통제할 수 있겠지. 

 

[카이로스]

고작 어린 소녀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로샤]

신녀는 제 목숨을 걸고 돌아왔네.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카이로스 경, 에르세르의 전설엔 유독 마음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나. 신뢰, 기쁨,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희망... 왕족의 피가 마법진을 정화할 수 있던 것도 나의 조상이 국민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받고 있기 때문이잖나. 게다가...

 

로사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로샤]

저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말이야. 카이로스 경... 그녀의 용기를 보게. 짐 역시도 그녀가 여기서 지는 샛별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카이로스]

오늘따라 말수가 많으시군요. ...알카이드, 허락하겠다. 다만, 네가 폭주할 낌새를 보이거나 허튼짓을 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처단하고 신녀를 제물로 삼을 것이다. 명심하거라. 미련한 제자에게만 맡겨둘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나서야겠군. 

 

카이로스는 지금도 차갑고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조금 달라 보였다. 알카이드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

 

 황성의 문이 차례로 열렸다. 로샤는 모든 병력을 주변 경계에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반란군 수장 실버나이트가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다.

 강림 의식의 시작까지는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알카이드는 카이로스의 허락을 얻어 나와 함께 대기했다. 우리는 황후 침전에서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알카이드]

사실 난 예상 못 했어요. 

 

[나]

뭐를요? 

 

[알카이드]

당신이 내 계획에 반대할 줄 알았거든요. 이미 한번 실패했으니 강림 마법진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나]

마법진은 아직도 안 믿어요. 난 알카이드를 믿는 거예요. 알카이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니까요. 그리고 결과가 어찌 되든, 후회는 안 할 거예요. 끝까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알카이드가 내준 과일차는 여전히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나]

알카이드.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부탁했다. 

 

[나]

잠깐만 눈 감아줄래요? 

 

 알카이드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알카이드에게로 바싹 다가가 앉은 나는 두 손으로 살며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살며시 포겠다. 알카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나 뜨거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나 역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을 알려주듯 공기는 부쩍 차가워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춥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이 있는 한 우리에겐 매일 매일이 따뜻한 봄일 것이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났다. 

 

[나]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성문이 열리고 반란군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그 순간이 다가왔다. 나와 알카이드는 맞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중양광장으로 향했다. 별 하나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알카이드가 뻗은 손끝에서 빛이 떠오르더니 하나둘씩 하늘로 올라갔다. 떠오른 별빛들은 계단을 이루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높은 곳까지 뻗어갔다. 동시에 강림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카이로스가 직접 나섰다. 그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강림 마법진의 도달점을 계단의 끝과 잇는 데 성공했다. 저 별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은 강림 마법진의 끝, 즉, 얼음 나비가 없는 새로운 세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황족의 피는 이미 마법진 정중앙에 있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두 세계의 통로를 뚫을 강렬한 감정뿐이다.

 그때, 알카이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드럽고 상냥한 그의 목소리는 마법을 통해 증폭되어 온 황성 안에 퍼져나갔다. 

 

[알카이드]

모든 신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두려움은 잠시 접고 마법사들의 지시를 따라주세요. 저 별의 계단 끝에 얼음 나비가 없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이동시켜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추위와 위협이 없는 곳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소란스럽던 황성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기 이한 별의 계단과 믿을 수 없는 안내 내용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 듯했다. 게다가 겁이 나서인지, 어느 누구도 감히 계단에 발을 내디디지 못했다. 당황한 나는 알카이드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았다. 그는 미소 지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알카이드]

급할 것 없어요. 기다려보죠.

 

[소년]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얼어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나는 올라가볼래! 

 

군중 속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나와 계단에 뛰어올랐다. 그러자 아이가 올라선 별의 계단이 천천히 떠올랐다. 

 

[지켜보던 여자]

세상에! 정말 하늘로 올라갔어...! 

 

[지켜보던 남자]

마법사의 말이 진짜인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별의 계단을 오르는 이가 나타났다. 생명을 짊어진 별들이 여기저기서 떠올랐다. 

 

[소년]

저게... 뭐지? 아아, 보인다! 다른 세계가 보여! 우와아아! 온통 초록빛이야! 

 

마법으로 증폭된 소년의 목소리가 하늘 저편에서 울렸다. 황성은 이내 흥분의 도가니였다. 

 

[남자]

늦기 전에 우리도 따라가자! 

 

[여자]

아가, 엄마 손 잘 잡으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별의 계단에 올랐다. 빈민가 사람들부터 병사와 반란군까지도. 투쟁이란 본디 생존을 위한 것. 탈출로가 공평하게 열리자 사람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반목을 멈추었다. 

 

"별을 따라가세요."
"별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줄거예요."

 

 

나는 고개를 들고 계단의 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눈부신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알카이드가 속삭였다. 

 

[알카이드]

성공이에요. 당신도 어서 가요. 내 힘으로 당신을 보내줄 수 있.. 어... 기쁘...

 

미처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알카이드는 그 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가없은 유성처럼, 그는 온 세상의 소원을 짊어진 채 스러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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