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방문자

2023. 12. 27. 19:40다음 역, 에덴/첫 에덴

끔찍한 혼란. 이곳은 혼란 그 자체였다. 최초의 희생자가 도화선이 되어 더 많은 충돌, 욕설, 고함, 그리고 서로를 향한 저주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로샤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나]

왜 그래요? 

 

로샤는 묵묵히 망토를 벗어 내게 걸쳐줬다. 가방과 내 소지품들은 망토 아래 가려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망토에 스민 그의 체온이었다. 

 

[나]

로샤?

 

제대로 물어보려던 순간, 또 다른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바람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 주는 후드로 얼굴을 잔뜩 가린 상대가 나타나자, 주변의 소란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잘 지냈어? 

 

상대가 입을 연 순간,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긴 갈색 머리,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

 

[로샤]

또 만났군. 그나저나 레지스탕스가 웬일로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관심을 갖는 거지? 

 

[???]

그냥 돌아다니는 것뿐이야. 잠재력을 가진 씨앗이 있나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불결하기 짝이 없는 것들 천지네.

 

웃음기 머금은 말투로 사람들을 비난하는 태도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오만하게도 느껴졌다. 

 

[???]

적을 상대할 용기도 없으면서 동료의 전리품을 빼앗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니, 볼썽사납군. 

그들은 천으로 감싼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결정을 주워 들었다. 누구도 그에게 맞서지 못한 재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그가 얼굴을 돌렸을 때, 루카스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후드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이곳의 전투를 줄곧 관찰할 뿐이었다.

 

[나]

당신이 말한 잠재력 있는 씨앗, 그건 무슨 뜻이죠? 

 

[루카스]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 혼란과 충돌 속에서야말로 사람의 가치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지. 오늘 같은 상황은... 꽤 괜찮은걸. 

 

내 불안함을 알아챈 듯, 로샤가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귓속말을 건넸다. 

 

[로샤]

'밸런서' 루카스야, 레지스당스의 참모지... 2인자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레지스탕스? 새로운 이름이 또 다시 등장했다. 

 

-

 

루카스는 내 불안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망토 속 머리 끈을 가법게 풀었다. 나른하게 고개를 돌린 그는 로샤를 쳐다봤다. 

 

[루카스]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그만두지. '여행가' 로샤, 우리 조직에 합류하는 게 어때?  그나저나, 그 꼬맹이는....? 

 

루카스가 무심한 듯 날 향해 시선을 옮겼다. 

 

[로샤]

내 동생.

 

[나]

?!

 

[루카스]

으음? 방금 전 소동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던데. 한낱 물자 때문에 탐욕을 부리지도 않고, 쓰레기를 앞에 두고 체면도 구기지 않더군. 게다가 흥미로운 능력도 가졌고 말이야. 

 

[로샤]

내 동생이니 당연히 최고일 수밖에. 

 

로샤는 우리의 '관계'를 벌써 두 번이나 강조했다. 진지한 목소리에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 숨은 다른 뜻을 난 알아챌 수 있었다. 로샤는 루카스에게 나에 대해 일절 알려주지 않으려는 거다. 

 

[루카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감싼다면야. 레지스탕스에 들어온다면 너와 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꼬맹이 모두 뜨거운 환대를 받게 될 거야. "여행가는 능력자가 아니다." 같은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마.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루카스]

강함이라는 건 능력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야. 여기서 비롯될 수도 있지. 여행가, 네 동생의 자료를 대장에게 넘길 생각이야. 대장이 꽤 흥미로워할 거 같단 말이지. 

 

내 곁에 선 로샤는 입을 닫은 재 멀어져가는 루카스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루카스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디디며 개찰구를 향해 사라졌다. 나와 로샤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가던 루카스는 개찰구에 멈춰서더니, 소매 속에서 뭔가를 끼내 허공을 향해 보여줬다. 뒤이어 기계음이 다시 들려왔다. 

 

[기계음]

방문자 인증 완료.

 

루카스의 모습이 개찰구 뒤로 사라졌다. 에덴으로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던 로샤는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로샤]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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