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출전

2024. 6. 18. 22:41다음 역, 에덴/사냥매 (카이로스)

 카이로스와 함께 지하 통로를 달렸다. 낡은 지하 셀터를 연거푸 지나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지하 통로를 통과했다. 카이로스는 더 큰 진동이 느껴지는, 낡은 장소로 향했다. 위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커질수록 타락자와 방랑자가 마구잡이로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카이로스는 무척 낡아 보이는 지하 셀터로 나를 끌고 갔다. 

 계속되는 진동에 괴물들이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이로스]

잠깐 쉬자.

 

놀란 내 얼굴을 확인한 카이로스가 짧게 말을 꺼냈다. 

 

[카이로스]

여긴 지상과 가까운 편인 것 같아. 그렇기에 오히려 이 위험한 곳에 누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 순간, 천장이 또 다시 마구 흔들리며 머리 위로 모래와 돌조각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

여기서 푹 쉬진 못할 것 같네요...

 

[카이로스]

그럼 벽에 기대앉아 눈감고 쉬기라도 해. 그래야 체력을 비축할 수 있지. 

 

 나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담벼락에 앉은 카이로스의 옆에 앉았다.

 위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을 이를 수 없었다. 할 일 없이 앉아 있다 보니,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흰 정장 차림의 알카이드는 '에덴의 주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

미안해요.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카이로스]

무슨 소리야? 

 

[나]

​내가 아니었다면 에덴에서 해야 할 일 같은 건 없었을 테니까요.

 

[카이로스]

그건 그렇지. 

 

카이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니, 더욱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

 맘 놓고 도움을 받는 게 아니었어요. 카이로스의 도움으로 능력자 조합에 들어가선 안 되는 거였는데, 오히려 폐만 끼치고...

 

[카이로스]

네 말이 맞아. 난 에덴의 풍경을 감상하고 그린 아일랜드를 둘러볼 생각이었는데...게다가 싸워야 할 필요도 못 느꼈고 말이야. 그렇지만 너를 외면한다면, 난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외롭게 죽겠지.

 

[나]

....?!

 

[카이로스]

말했잖아. 싸워야 할 이유가 생긴 지금이 그리 나쁘진 않다고. 에덴에서 해야할일같은건 애초에 없었어. 네가 내게 그 이유를 줬지. 최책감 느낄 필요는 없어. 솔직히 사심도 좀 있었고... 네가 말한 것 처럼, 그자는 분명 에덴의 주인일 기야. 그자에게선 내가 싫어하는 기운이 풍겨. 마치 이 에덴처럼 우울한 기운 말이야. 하지만 너에게선 햇빛의 기운이 느껴져. 빛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지. 네가 그자를 멀리했으면 해. 그리고 이 세상에 변수를 가져다주기를 원해. 

 

[나]

하지만 '열쇠'라는 낙인이 찍힌 지금은 벼랑 끝에 몰린 거나 다름없어요... 제가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카이로스]

괜찮아. 난 널 믿어. 그러니 너도 너 자신을 좀 믿어봐. 년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강해. 약자를 배려하며, 강자를 두려워하지 않지. 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분명 너일 거야.

중앙관리실로 가자. 우리가 '열쇠'라면, 문을 열 방법도 우리에게 있을 거야. 년 에덴의 주인과 맞서 싸우는 데만 집중해. 

 

[나]

카이로스가 희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던 약속, 기억해요? 내겐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라면서, 본인은 최악을 준비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카이로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손을 뻗어왔다. 그리곤 부드럽고도 조심스레 내 뺨을 쓰다듬었다. 

 

[카이로스]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카이로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쉬자.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곤, 담벼락에 음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이 잔뜩일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쉬어야 한다. 억지로라도 한숨 자두는 편이 좋을 거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카이로스의 위로도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덴의 비밀에 관한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카이로스마저 위험에 끌어들이고 말았다 심란한 기분에 손으로 가법게 무릎을 쓸었다. 

 

-

 

[나]

완전 엉망이야.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후회돼. 

 

[카이로스]

누구든 후회스러운 짓을 하지. 


 카이로스도 잠이 든 게 아니었는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카이로스]

자기는 틀린 것 같으니 이야기나 들려줄까? '블랙 샤크' 엘리샤에 관한 거라면 관심 있을 것 같은데. 


 카이로스는 담벼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카이로스의 스승인 엘리사는 사막 최강의 능력자다. 에덴에서 능력을 얻은 그녀는 모래 괴물의 결정으로 힘을 기르는 동시에 대가도 치러야 했다. 그녀의 대가는 그녀의 정신을 파괴하고, 그녀의 기억을 앗아갔다. 어느 날부터 엘리샤는 그동안 지냈던 지하셀터로 돌아가지 않고, 사막을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집도, 그리고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제자도 모두 잊어버린 채...

 

[카이로스]

며칠은 힘들었지만, 금세 익숙해졌어. 제 몫을 하는 능력자가 됐으니,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 그다지 충격적이진 않았거든.

 

 카이로스는 '에덴'의 능력자라면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외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잃어버린 사람은 기억해 둘 필요가 없다. 작은 기넘품이라도 남겨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카이로스는 그 일이 있은 후 엘리샤를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막에서 혼자 살아가기도 어려운 탓에, 방랑자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감정의 동물이다.

 어느 날, 카이로스는 바이크를 탄 채 사막에서 모래 괴물을 사냥하다가 몇몇 능력자와 마주쳤다. 제정신이 아닌 '블랙 사크'를 사냥해 소울 스톤을 챙기자는 그들의 말이 카이로스의 귀에 박혀 들어왔다. 사막에서 방랑자를 사냥해 결정보다 강한 소울 스톤을 빼앗는 건 흔한 일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능력자들은 서로의 사냥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영문에서인지 카이로스는 그들을 조용히 뒤따라갔다. 카이로스는 본능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에덴 근처에서 엘리샤를 발견했다. 물론 그들은 엘리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엘리샤는 남다른 본능을 가진 최강의 능력자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전투 본능이 오히려 더 발달되어 있어 무자비하게 적을 쓰러뜨렸다. 카이로스는 멀찍 이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다가, 엘리샤가 모두를 쓰러뜨린 것을 확인한 후에 자리를 뜨려 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엘리샤의 칼날이 그의 목덜미에 드리위져 있었던 것이다. 위험에 남다른 촉을 가진 엘리샤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던 카이로스의 존재를 깨닫곤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방랑자가 된 엘리샤는 이성을 읾은 채 주변의 모든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내가 열세였지. 온몸은 부상으로 엉망이었어. 난 결국 엘리샤와 함께 생을 마감하기로 마음먹었어. 빈틈을 찾기가 쉽진 않았지만, 기회를 틈타 반격에 나섰어.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녀가 손을 멈춘 거야. 마지막 순간에 날 알아본 거지. 한계를 넘은 능력자에게 의식은 존재할 수 없었

지만, 그녀는 방랑자가 된 뒤에도 날 잊지 않았던 거야. 

 

[나]

언제나 잊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건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감탄 어린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나]

카이로스의 스승님은... 내면이 무척 강한 분이시네요. 

 

[카이로스]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게... 그녀의 마지막 가르침이었지. 지금도 후회해. 그날 호기심에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의 죽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쳤어. 사람들은 날 사막을 날아다니는 '사냥매'라고 부르지만, 정작 나는 그녀가 소울 스톤으로 변하는 길 지켜볼 용기조차 없었지. 방금 엉망이라고 했지? 날 봐, 너보다 내가 더 엉망진창이야.

 

[나]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카이로스]

맞아, 그녀를 해칠 의도는 없었어. 너 역시 날 일부러 끌어들인 게 아니잖아? 그러 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누구나 실수를 저질러, 그리고 후회하지. 이런 말이 있어. 오늘 무슨 잘못을 했든, 내일은 다른 하루다. 미래를 생각해. 내일은 힘들지만 더 나은 하루가 될 거야. 

 카이로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느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전날 밤에는 잠을 설쳤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부드러운 뭔가가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따뜻했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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