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블랙 스트릿과 그 사람

2024. 5. 12. 15:15다음 역, 에덴/사냥매 (카이로스)

전설적인 외길잡이 사냥매, 사막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자여.

 현 시점에서 종합적으로 따져보자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카이로스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도 카이로스는 1132번 지하셀터를 도와줬고 내게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줬다. 본능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카이로스를 선택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저와 신입들이 머물 만한 곳을 찾아줄 수 있나요? 부탁할게요. 

 

카이로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우리를 거주 구역에서 데리고 나왔다. 

 

-

 

 메인 거리에서 벗어난 후에도 우리는 여러 블럭을 지나왔다. '에덴'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호의적이지 못한 눈빛이 거리 곳곳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이로스가 있으니, 누구도 쉽게 우리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 카이로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말을 붙일 기회는 없었다.

 내 옆에선 십 대로 보이는 능력자가 유쾌한 미소를 지은 채 걷고 있었다. 슬쩍 물이봐도 될 것 같다. 

 

[나]

저기 뭐 좀 물어봐도 될까? 

 

[클라우드]

물론! 내 이름은 클라우드. 내 생명의 은인이니 최선을 다해 알려줄게. 

 

[나]

길가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던데...

 

[클라우드]

당연하지. '안전 시간'이 지났으니까 결정을 노리는 거야. 우리 같은 신입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로 보일걸. 

 

[나]

그래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사냥매 때문이야? 

 

[클라우드]

그렇지, 그 유명한 '사냥매'잖아. 하루에 수백 마리의 모래 괴물을 처치한 적도 있대 . 그날 모두가 사냥매 주변을 에워쌌지만 결정 하나도 못 주웠다고 들었어. 물론 그런 사냥매에게도 전설적인 스승님이 있지. '블랙 샤크' 엘리사 님은 엄청 대단하다고 해. 

 

엘리사? 이 세계에서 카이로스의 스승이었다니... 이곳에서 엘리사 이사장님은 어떤 성격일까? 앞으로 만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 

 

[나]

엘리사 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어? 

 

[카이로스]

뒤에서 함부로 남 얘기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클라우드]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클라우드는 혀를 날름 내밀고는 더는 아무 소리도 못했다. 카이로스 역시 별말 없이 우리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골목을 몇 번 더 지난 뒤, 카이로스를 비롯한 우리는 황폐한 거리 앞에 멈춰섰다. 

 여긴 '에덴'의 변두리가 분명했다. 버려진 건물 뒤로는 끊임없이 누런 모래가 휘날리고 있었고, 모래 괴물의 소름 돋는 울부짖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건물이 밀집된 버려진 폐허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건물을 뒤덮은 푸른 덩굴, 깨진 수도관에서 흐르는 폐수,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철근, 위태롭게 보이는 건물까지... 마지막 아름다움마저 벗겨진 곳이 있다. 

 

[떨떠름한 표정의 능력자]

정말 황량하네요.

 

​[카이로스]

블랙 스트릿이야. 가장 위험한 곳이지. 하지만 이곳엔 강한 용병이 있어. 그녀가 너희를 보살펴줄 거다. 

 

 말을 마진 카이로스가 비려진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노란 용병옷 차림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햇빛이 나뭇가지를 통과하며 소녀의 얼굴을 비췄다. 초췌하지만 아름다운 얼굴...  순간, 몸이 굳어버 리고 말았다. 생각지도못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다니. 카이로스는 이곳에 강한 용병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채린과는 다른 소녀다. 강인한 힘으로,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돕고 있었다. 

 

​[에린]

신입들이야? 나는 에린, 너희보다 사흘 먼저 에덴에 들어왔어.

 

에린, 이곳에서의 이름인가 보네... 예쁜 이름이야. 

 

[에린]

내가 '능력자 조합을 만들었어. 에덴에 들어온 능력자라면 가입할 수 있어.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거지. 너... 왜 그래? 

 

[나]

아냐, 아무것도. 그냥 너무 반가위서... 나랑 친한 사람과 너무 닮아서 순간 감정이 북받쳤나 봐. 

 

[에린]

우리, 아는 사이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에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날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에린]

하지만 상관없어. 너도 능력자 조합에 들이올 거지? 능력자 조합 소속으로서, 우리 모두는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야. 


 에린은 담담히 미소 지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이로스는 에린을 '강한 용병'이라고 소개했지만, 한때 잠시 만났다가 또다시 읾어버린 그 소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카운트다운의 숫자에 읽힌 비밀과 내 세계를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어떤 입장에 서든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함 없다... 평행세계 속 채린이 다치거나 희생되지 않도록 할 거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지킬 거다. 

 난 눈을 크게 뜨고 에린과 카이로스를 차례로 바라봤다. 

 

[나]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카이로스. 여기 남아서 능력자 조합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카이로스]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잠재력은 알아챘을 테지.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에덴에 적응하면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다. 강한 사람이야. 그러니 그녀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해. 


 카이로스의 말투는 강하게 느껴졌다. 


[나]

에린이 제 발목을 잡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카이로스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옆에 있는 에린을 향해 시

선을 돌렸다. 

 

[카이로스]

에린, 공짜로 그녀를 돌봐달라는 건 아니야. 이거 아직 기억하나? 


[에린]

네, 제 관할 지역이었던 1098번 지하 셀터를 구해줬다는 증거죠. 전 그 메달의 소유자에게 빚을 졌어요, 보답으로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했죠. 

 

[카이로스]

그 빚을 오늘 갚도록 해. 오늘 하룻밤만 이곳에서 묵게 해주대. 에덴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적인 것들도 알려줬으면 해.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부담을 주지는 말고. 


 카이로스는 날 한 번 쳐다보고는, 메달을 곧장 에린에게 돌려줬다. 

 

[카이로스]

능력자 조합에 들어오라고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차갑게 말한 그는 이내 자리를 뜨려는 듯했다. 


[클라우드]

사냥매, 저희랑 같이 계시는 게 아닌가요? 당신을 오래전부터 존경해왔이요. 

 

[카이로스]

난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아. 

 

 말을 마진 카이로스는 바이크에 올라타더니, 석양을 뒤로 한 채 뿌연 먼지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여기에 남아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걸.

 에린은 블랙 스트릿에 밀집한 건물 기숙사에 방을 마런해줬다. 블랙 스트릿의 건물에는 버려진 방이 잔뜩 있던 터라, 능력자들은 여기서 흩어져 지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지내는 방도, 나를 제외하곤 건물 전체가 비어 있었다. '능력자 조합이 블랙 스트릿에 거점을 잡은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능력자 조합에 소속되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표를 공격하려면 찾아야 하고, 목표물들이 흩어져 있으면 탐색에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이곳에 숨는 편이 대로변에 머무는 것보다는 확실히 안전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날 안심시키는 건, 능력자 조합의 창시자 에린이있다.

 에덴은 강자들이 집결한 곳, '안전 시간'이 지나면 에덴은 약육강식의 땅으로 변한다. 강자가 약자의 통신기를 빼앗고, 약자를 에덴에서 도태시킨다. 하지만 능력자 조합은 '에덴은 모든 능력자의 것이다'라는 모토를 지녔다. 아귀다툼과 약탈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건, 그저 에덴에서 잠시 쉬기 위함이다. 하지만 능력자 조합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에린 덕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에린은 매우 강한 능력자로, 자신의 날개로 다른 약자를 지킨다. 그녀의 권유로 이곳에 남게 된 사람들은 금세 진해지곤 했다. 

[에린]

용병 옷을 준비했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부드럽고 예쁘지만... 여기선 눈에 띄는 옷차림은 좋지 않아. 

 

​[클라우드]

저녁식사 대령이요! 푸른 섬의 호수에서 잡은 생선으로 스페셜 요리를 만들어봤어! 

 

클라우드가 빵과 산딸기, 튀긴 생선을 내 자리에 놔줬다. 

 

밤에는 무서운 괴물이 나온대. 년 사냥매가 눈여겨보는 사람이니까 분명 대단하겠지? 든든히 먹어야 밤에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거야. 

 

[에린]

클라우드, 얘는 전투에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어. 능력자 조합의 멤버가 아니라는 걸 잊은 거야? 

 

[나]

밤에는 뭐가 나타나는데?

 

[에린]

밤에는 방랑자라는 괴물이 나타나는데,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나]

모두와 함께 싸울게.

 

[에린]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식사 마치는 대로 쉬도록 해. 괴물은 자정 이후에 나타나거든. 지금부터 새벽까지 능력자 조합원들이 교대로 주변을 순찰할 거야. 누구도 널 위협하진 못할 테니 안심해. 그래도 자정 이후에는 일어나서 우리의 전투를 지켜봐줬으면 해. 카이로스한테 하루 동안 널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전투는 참여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에덴의 새벽과 극도로 위험한 전투에는 익숙해져야 할 거야. 에덴의 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면, 티켓을 가지고 에덴에 발을 디딘 게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에린은 말을 마진 뒤 클라우드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재빨리 식사를 마친 뒤, 에린이 알려준 대로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오늘 하루 동안 많은 사건을 겪은 터라 피곤했기에, 낡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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