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세월보다 긴 영원

2024. 3. 24. 16:16에르세르 대륙(完)/결말

단풍잎이 우리 두 사람의 재회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기를. 

 

 

그에게 미래가 없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신비한 존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비한 목소리]

어려운 길을 선택했구나. 그게 네 뜻이라니 존중은 하겠다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어둠 깊은 곳에 잠겨버 렸다. 보통 의지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야. 

 

줄곧 날 이끌고 길을 알려주던 목소리였지만, 카이로스를 되찾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카이로스를 그저 되찾기만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려는 것이다. 내 행복은 오직 그의 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 나의 봄, 나의 찬란한 미래는 그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

 이후로 나는 이를 악물고 그림에 매진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조차 쪼개 공부하고 연습했다. 내 힘의 근원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막강한 힘이 절실했다. 동시에, 나는 여러 세계를 거쳐 여정을 계속하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 덕에 나의 힘과 전투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다. 나는 그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갔다. 시공 여행을 이어가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 몸이 시간의 구속을 벗어난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전혀 나이 들지 않았다. 나는 점점 우주의 규칙을 깨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목표 달성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릴 것은 각오한 바였다. 

 

 유수 같은 세월이 지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세인트셀터 학원 역시 오래전에 사라졌다. 늙지 않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이름을 바꾸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사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겪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홀로 버려진 채 나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시공의 균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암흑 속에서 희미한 무언가를 분간한 순간, 때가 왔음을 깨닫고 주저 없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

 짙은 어둠을 헤치고 나아간 곳에는... 눈에 익은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그토록 그리던 나의 카이로스가 잠들어 있었다. 만나면 꼭 해줘야지, 하고 곱씹고 곱씹었던 수많은 말들 중 단 한마디도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걸어가 그의 머리에서 단풍잎을 떼어주었다.

카이로스는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나를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

보고 싶었어요, 카이로스...! 

 

[카이로스]

왜...!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째서...! 

 

 내 대답을 듣기도 전, 그는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흐느끼듯 속삭였다. 

 

[카이로스]

나도...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는 바로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내 모든 것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 다. 긴긴 세월, 나는 그의 곁으로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살아왔으니까. 

 들어가는 것보다는 어려웠지만, 나는 숱한 시도 끝에 카이로스를 데리고 시공의 균열을 따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어디로 갈지 묻자, 카이로스는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좋다고 했다. 나는 카이로스가 좋아할 만한 곳에 가고 싶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에르세르로 향했다.

 

-

 

봄을 되찾은 지 오래인 에르세르는 곳곳마다 꽃이 만발했다. 황궁에 살짝 숨어들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도 둘러봤다. 카이로스는 그곳이 추억의 장소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찾은 의식의 방. 지금은 기도실로 이용하는 듯했다. 카이로스는 기도실을 둘러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씩 기분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 그는 말끝마다 나를 무시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꼬박꼬박 반박하며 도발했으니까. 다 지난 일이니 잊자고, 첫 만남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는 나의 너스레에 카이로스는 처음 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에 없는 빈말이 아니다. 우리의 앞에는 아주 찬란하고 긴 미래가 필쳐져 있으니까.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질리도록 마탑 주변을 걸었다. 마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식 탐구의 장이 된 그곳은 늦은 밤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년]

어어?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돌아보니, 소년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카이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년]

어디서 봤...? 어! 맞다! 그, 그, 카 뭐더라? 아무튼 그 사람! 누나! 누나! 빨리 와봐! 카... 그 사람이랑 똑같이 생긴 아저씨가 있어! 

품에 안고 있던 앨범을 뒤적거리던 소년은 오래된 우표를 한 장 꺼내 카이로스와 번갈아 살펴보았다. 

 

[마법사]

너 인마, 처음 본 분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무슨 짓이야! 그리고 카이로스 님은 수백 년 전 대륙의 구국영웅이시란다, 제발 공부 좀. 

 

그녀는 민망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사과했다. 

 

[마법사]

죄송해요, 제 동생이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버릇없는 짓을 했네요. 

 

[소년]

아무것도 모른다니! 잠깐 까먹은 것뿐이지, 나 공부 많이 했거든? 카이로스 님은 마탑을 세운 대마법사잖아! 그분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우리 대륙을 재앙으로부터 구했다는 것도 알아! 아, 그러고 보니 잠깐. 누나, 지난번에 시험에서... 알카이드였나? 그 마법사랑 헷갈리는 바람에 역사 시험 혼자 낙제했다고...

 

 누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지자 소년은 우표와 앨범을 챙겨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쳤다. 

 

[나]

사이좋은 남매네요. 

 

[카이로스]

그런가...? 그건 그렇고... 어쩌다 내가 구국의 영웅이 됐지? 

 

[나]

알카이드가 당신의 전기를 써서 후대에 전하겠다고 했어요. 

 

[카이로스]

너무 긴 세월이 흘러버렸군. 알카이드도, 다른 제자들도 만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모두 떠나고 없겠지. 

 

[나]

내가 있잖아요. 나는 당신을 만나려고 끈질기게 기다렸어요. 

 

카이로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카이로스]

다시는 혼자 두지 않으마. 나는 계속 너와 함께 살아갈 거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행복이란 걸 바라볼 생각이야. 

 

 나는 카이로스의 따뜻한 손을 맞잡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오랫동안 내 생각만 해와서일까. 카이로스는 나를,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카이로스와 함께 북부로 갔다. 그리고 너무나 멋진 농장을 발견했다. 농장 옆에는 널따란 호밀밭이 필쳐져 있고, 방앗간의 풍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인심 좋은 농장 주인은 갓 구워 따끈따끈한 빵을 맛보라며 주었다.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빵은 천상의 맛이었다. 

 카이로스는 한참이나 상념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곳을 보니 고향인 아이리스 마을이 떠오른다고 솔직히 답했다. 비록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곳일지라도, 그는 마법사가 된 후 일부러 찾아갔을 정도로 고향에 애착을 보였다. 카이로스에게 새로운 고향의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꼭 머물고 싶다고 그를 졸랐다. 카이로스는 나를 위해 작은 정원이 딸린 통나무집을 지어주었다. 마을에 학당을 세운 카이로스는 후학을 양성했고, 나는 본격적으로 약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약용 샐비어(아주 약간의 문제를 가진) 재배에 성공했던 날 밤, 카이로스는 허락도 없이 내 실험작을 전부 뽑아 뒷마땅에다 파묻어버렸다. 

 

[카이로스]

아주 약간의 문제라고? 사람처럼 깔깔 웃거나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는 셀비어는 약으로 쓸 수 없어. 그건 그냥 괴생명체이지. 

 

몹시 억울했던 나는 날이 밝자마자 마을의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밀려온 〈대마법사 카이로스의 약초 재배 이론 고급편〉을 카이로스의 앞에다 턱 펼쳤다.

 

[나]

이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했거든요? 아, 뭐, 어려워서 중간중간 빼먹은 부분은 있었지만... 어쨌든 내 잘못 아닌걸요!

 

카이로스는 한숨만 퍽퍽 내쉬었다. 

 

[카이로스]

그래. 네 잘못은 아니지. 그래도 어떻게... 아니, 그만두자. 

 

카이로스는 뭔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쓰고 있는 이번 책의 제목은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약초 재배 입문 걸음마편〉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어느덧 석 달째에 접어들었다. 어느 날 새벽, 카이로스는 탁자에 앉아 뭔가를 써내리고 있었다. 책의 집필은 끝났는데 월 또 하는지 궁금했다. 

 

[나]

카이로스 선생님은 수업 준비로 바쁘신 모양이네요. 

 

 나는 마법으로 머리카락을 땋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카이로스에게서 기초적인 마법을 전수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카이로스]

아니. 학당을 정리하려고 양도 서류를 쓰는 ㅈ...? 

 

 펜을 멈춘 카이로스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저절로 땋이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본 그의 눈썹이 움찔했다. 

 

[카이로스]

으음. 그 마법은 그런 용도가 아닌데. 

 

[나]

응! 매듭짓는 마법인 건 알아요. 그지만, 머리 땋기 귀찮을 때 쓰면 얼마나 편하한데요.

 

윽, 표정 보니 심기 불편해졌네. 생각해보니 유화로 수채화를 그리는 걸 보면 나같아도 저런 반응을 보이겠지. 다음부터 이 마법은 몰래 숨어서 써야겠다. 그건 그렇고...

 

[나]

학당을 왜 정리해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게 싫어졌어요? 

 

카이로스는 고개를 짓고서 창밖을 바라봤다. 

 

[카이로스]

그런 건 아니지만... 한곳에서만 머물자니 지루해서 못 견디겠어. 

 

 뭐라고? 말도 안 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내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그가 석 달을 못 견디겠다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가 지루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사람.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여행 계획은 완벽히 잡혀 있었다. 그는 내게서 들은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착안해 여행 경로를 안내해주는 마법지도까지 만들어놨다. 이주를 위해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카이로스의 손짓 한 번에 모든 짐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상자 두 개에 들어갔다. 

 그날 밤, 우리는 집을 나와 강줄기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법 걸린 상자 두 개가 춤을 추는 것처럼 들썩거리며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

으음, 카이로스? 이런 용도의 마법이 아닌 것 같은데요? 

 

[카이로스]

짐을 들면 네 손을 잡을 수 없잖아. 융통성이 없네.

 

 황당해 내가 입을 뻐끔거리자 카이로스가 소리 내 웃었다. 문득 그가 걸음을 멈췄다.

[카이로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긴 삶을 살아왔어. 비슷한 일상이 끝없이 이어지다 보면, 모든 일에 무감각하고 메마르게 되지. 너와 함께하기 전의 내 모습... 꿈에서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행복이 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모두 네 덕이야. 

 

[나]

나도 마찬가지예요, 카이로스. 

 나는 카이로스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깊고 푸른 눈동자에 희미한 불안감이 배어나있다. 카이로스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는 자신처럼 긴 삶을 살게 된 나 역시 메마르고 무감각해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는 나를 데리고 여러 곳을 다니고 싶은가 보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카이로스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

그러고 보니, 당신의 세계를 제대로 여행한 적은 없네요. 구석구석 아주 많은 곳을 둘러보고 다양한 것을 접하고 싶어요. 당신이 찾았다던 전설 속 용의 뼈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신기한 물고기 떼도요. 이곳만이 아니라, 나의 세계도, 별의 바다 너머 모르는 세계에도 가보고 싶어요. 내 사람, 카이로스와 함께. 당신이 내 곁에 없다면, 어딜 가도 무의미할 거예요. 

 감정이 조금 격해져 울먹이고 말았다. 카이로스는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았다. 내 곁에 살아 숨 쉬는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뜨거웠다. 

 

[나]

영원히 함께 가야 하는 길... 두렵진 않아요? 

 

 카이로스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한층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카이로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 

 

카이로스는 내 머리카락에 잔잔히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카이로스]

사랑 고백에 영원을 들먹이는 것만큼 유치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만큼이나 우리 상황에 딱 맞는 고백은 없겠지. 세월보다 길고, 목숨보다 질긴... 넌, 나의 영원이다. 

 

카이로스는 살며시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카이로스]

사랑해.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 마침내 만난, 영원의 상대. 광활한 우주, 이 수많은 세계에 단 하나뿐인 인연. 새로운 하루가 밝으면, 우리는 어제와 또 다른 여정을 만들어갈 것이다. 매일매일, 그리고 영원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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