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 숲속의 맹세

2024. 3. 24. 16:04에르세르 대륙(完)/결말

함께 미래를 나누고, 함께 대가를 치르며, 이 맹세를 영원히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재앙을 물리칠 길을 힘들게 헤쳐오며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모든 일이 끝나고, 많은 날이 지났다. 우리는 에르세르의 이주자들과 함께 다른 세계에 정착했고, 착실하게 새로운 터전을 건설 중이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많은 사람을 이끄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가장 최근의 과제는 거주지 외곽에 방호 울타리를 치는 것이었다. 작업 범위가 넓은 만큼 부담이 큰 작업이었다. 그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오랜만에 그림 소울의 힘을 이용해보았는데, 이 정도 규모의 완벽한 방호 울타리가 정말로 소환될 줄은 나도 몰랐다. 

 

[아인]

꼭 왕관 같군. 혹시, 일부러 저런 모양으로 만든 건가? 

 

[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힘을 쓸 때 당신 생각을 하긴 했죠.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아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어색해진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다. 

 

[나]

왕관 같아서 싫어요? 하긴. 지도자로 모시겠다는 읍소도 계속 거절해왔으니깐...

 

[아인]

아니, 보기 좋다는 뜻이었어. 울타리뿐 아니라 네가 만든 것은 다 아름다워. 

 

 바쁜 나날 속에서도 아인은 꼭 시간을 내 번화한 곳을 벗어나 나와 함께 숲을 산책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숲속을 거닐다 나무 밑에 앉아 쉬던 중, 나는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잠에서 깨보니 아인의 얼굴이 이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

아... 나 혹시 오래 잤어요? 

 

[아인]

더 자도 괜찮아. 잠깐뿐이었어.

 

그는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아인]

꿈을 꾸는 것 같던데. 

 

그를 올려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났다. 

 

[나]

으응.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아인을 마주 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그는 일어서서 근처의 키 큰 나무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무의 위를 빤히 올려다봤다. 

 

[나]

뭐 하는 거예요, 아인? 

 

[아인]

큰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답례를 해야겠지. 

 

 그렇게 대답한 아인은 나무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꽃 중에서도 가장 크고 탐스러운 것을 꺾어다 내게 주었다. 

 

[아인]

너를 닮은 꽃이야. 뒤늦게 깨달았어. 진정한 영광이란 한 사람이 그동안 책임져온 것들, 그리고 줄곧 걸어온 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목덜미를 언뜻언뜻 스치는 그의 손길은 데어버릴 듯 뜨거웠다. 

 

[아인]

아름다워. 

 

 귓가에 대고 한숨처럼 속삭이는 말에는 진한 열기가 묻어 있었다. 

 

[아인]

내가 가진 지금의 이 영광은 너와 함께 이룬 것이야. 그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할게. 

 

 진심을 담은 아인의 미소 뒤로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비쳤다. 나 역시 그에게 진심을 담은 미소로 화답했다. 

 

[나]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걸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는 결코 휩쓸리는 일 없이 제 길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용감한 사람. 바로 나의 아인이다. 살며시 내 어깨를 감싸 안은 그는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인]

지금부터 내가 할 말 잘 들어.

 

 조용한 숲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듣기 좋은 새소리들 사이로, 그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져 왔다. 

 

[아인]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남은 시간은 전부 너의 것이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나]

흐음, 말하는 걸 보니 거절할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아인]

맞아. 네가 나를 먼저 찾았으니, 절대 날 버리면 안 돼.

 

우리의 처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

그래요. 제가 당신을 책임질게요.

 

[아인]

나는 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네 미래를 얻고싶어. 너를 안고, 매일 속삭일거야.

 

 영원을 약속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볍고, 또 진지했다. 바람이 우리 뒤에서 나뭇잎의 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를 몰고왔다. 그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아인의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나]

그럼 제게 진 빚을 갚는 걸로 하죠.

 

[아인]

네게 진 빚이라니...

 

 손을 뻗은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귓가에다 속삭였다. 

 

[나]

솔직히 말하면 아인, 키스하는 타이밍이 엉망이에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아인은 내 입술을 훔쳐버렸다. 지금 이 순간, 이 넓은 세계엔 그와 나 단둘뿐이다. 조용한 숲속에 우리 둘만의 약속이 뜨겁고도 깊게 새겨져갔다. 짧고도 긴 순간, 모든 감각들은 서로에게만 집중되었다. 뜨거운 숨결이 어지러이 뒤섞이는 가운데, 그가 나직이 고백했다. 

 

[아인]

...말해봐, 이번에는?

 

 나 역시 그의 고백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술에 가로막혀 그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인의 뜨거운 품에 단단히 안긴 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내 간절한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내 손을 꼬옥 마주 잡아주있다. 

 

사랑은 바람을 등지고 횃불을 켜는 것.

손이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소중히 지켜나가는 것. 

이미 서로의 손을 잡은 이상

더 이상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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