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운명의 시작

2024. 3. 23. 20:31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사방이 어두웠다. 카이로스는 어디로 갔지? 겁이 덜컥 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벌떡 일어나 암흑 속을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이번에는 여덟 명입니다. 흔적은 전처럼 깨끗하게 지웠습니다. 

 

[???]

수고했다. 

 

 이 목소리는... 예신?

 마침내 시야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두꺼운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허름한 방 안, 예신은 손발이 묶인 채 울부짖는 아이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예신]

독이 몸에 퍼져 충분히 고통스러워할 때 마법약을 주거라. 

 

뭐라고...? 나는 예신에게 소리쳤지만 예신은 내 외침은 커녕 나의 존재 자체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장에 아이들을 구해내고 싶건만, 보이지 않는 벽이 나를 막았다. 그림 소울을 소환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인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과 물을 준비했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약을 나눠주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또다시 하얀 안개에 막혀버렸다. 잠시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보고있는 광경은 과거 에르세르 대륙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이 때 예신은 에르세르 대륙에 와서 마법사를 양성하고, 또 그 마법사들을 얼음나비를 만드는 촉매로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모든 재앙의 근원.

 예신이 마법사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음식과 옷을 제공한 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명목으로 약을 먹인 것이다. 생존욕이 강한 사람들은 약을 먹고 그 고통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죽겠지.

 흡사 지옥도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울부짖고 몸부림치다 차례로 침묵했다. 죽음의 정적이 내려앉은 자리, 단 한 아이만이 거친 숨소리를 힘겹게 이어갔다. 그 가운데, 한 아이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소년]

으윽... 하아...

중상을 입은 듯한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병을 손에 쥐고 누워있었다.

 

[예신]

이런. 마법약을 먹지 않고서 맹독을 버텼구나. 살려면 어서 먹어야 한다. 

 

[소년]

안...먹어. 난 이대로... 죽을 거, 야. 

 

사내아이의 검푸른 머리색이 눈에 익었다. 거친 숨을 몰아주는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럼 에도 또렷했다. 예신은 흥미를 느꼈는지 다시 설득했지만, 아이는 고집스럽게 마법약을 거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힘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예신]

이번 실험도 실패인 것 같군. 아이들을 더 많이 모아 와라. 

 

 예신은 더없이 태연하게 자리를 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이마저 그대로 버려졌다. 예신이 사라지자 무슨 일인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사라졌다.

 나는 살아남은 아이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살며시 눈을 뜨는 아이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카이로스... 당신이었구나...

 간신히 눈만 떴을 뿐, 어린 카이로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손에 들린 약병을 쥐고서 망설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죽고싶지 않은 거야. 그러나 카이로스는 끝내 마법약을 마시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는 아예 약병을 박살 내고 미련을 버리려는 듯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마법약을 억지로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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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3. 붕괴

안돼!  죽게 내버려둘순 없어!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 었다. 나는 카이로스의 손에 들린 약을 뺏어 억지로 그의 입에다 홀려 넣었다. 카이로스는 눈을 뜨고서 공허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세상이 일제히 붕괴해버렸다.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 때문에 과거가 바뀐 건가? 카이로스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그건 올바른 흐름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뀐 과거 속에서 인과가 뒤엉켰다. 그 결과, 나의 이번 시공 여행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날 기다리고 있을 카이로스는 거품 저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나아갈 길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손을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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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지로 약을 먹이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에게 맞는 길은 아닐 것이다. 카이로스는 강한 사람이었다. 힘든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끈질기게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홀로 두지 않는 것뿐이다. 나는 여리디 여린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내 손이 생명줄이라도되는듯 얼마나 꽉 붙잡고 매달리는지, 그의 손마디가 온통 새하얗게 질렸다. 

 

[카이로스]

흑! 죽는 건 싫어...! 그치만...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데... 난 어떡해야, 흐흑...! 

 

[나]

살아야 해요. 타인의 필요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요. 그리고 운명을 바꾸는 거예요.

 

 내 말이 카이로스에게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눈물을 홀리며 병을 열더니 스스로 약을 삼켰다. 격렬하게 기침하던 카이로스가 다시 눈을 반짝 떴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듯, 카이로스는 온몸을 잔뜩 웅크렸다. 약병을 집어던진 그는 신음을 삼키며 몸부림쳤다. 유리 조각에 다칠까, 나는 서둘러 카이로스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카이로스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고, 신비한 빛무리가 그를 항해 모여들었다. 카이로스의 주변을 떠다니던 빛의 파편은 콛장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아주 잠깐이 었지만 나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마법사 카이로스의 빛이란 것을. 

 

[나]

카이로스...

 

 잘했어요, 카이로스. 이마에 배어난 식은땀을 닦아준 뒤 조심스레 그를 바닥에 눕혔다. 열린 창문을 통해 단풍잎 한 장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아, 그래. 카이로스는 단풍을 좋아하지 ... 나는 단풍잎을 주워 그의 손에다 살며시 쥐여주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돌아왔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직감했다. 저 앞에서 카이로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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