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별의 바다와 나비

2024. 3. 23. 20:31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조나단의 감정은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실험실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알로라의 시신은 어느덧 양쪽 세계의 경계선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거대하고 화려한 얼음 나비였다! 나비가 날개를 필럭이자 시공의 흐름은 단번에 바뀌었다. 

 

[조나단]

안돼! 어느 놈이 감히...!

 나비는 이내 알로라의 시신을 등에 태우고 우주의 난류를 헤쳐나갔다. 이쪽 세계의 경계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신비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빛깔을 띈 저 나비가 낯설지 않은 까닭은 왜일까. 이 나비는 내가 그동안 봐왔던 얼음 나비와 다른 것은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무늬만이 아니다. 이 나비는 자의식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막강한 의지를 가진 마법사가... 잠깐, 설마...! 카이로스!

 

[조나단]

안 돼...! 내 딸을 돌려줘!!

 

 조나단은 미친듯이 제어기를 누르며 울부짖었다. 그의 감정으로 시공의 공명이 한 단계 더 증폭되어 별의 바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나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고 묵묵하게 에르세르로 향할 뿐이었다.

 너무도 익숙한 그 뒷모습을 보니 부인할 수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져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로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한 세계의 모든 짐을 외롭고 힘겹게 짊어져왔던 사람이었는데... 두 세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조나단이 동요하는 사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척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여기서 끝내야 해. 카이로스를 위해서라도. 눈물을 삼기고 숨을 깊게 들이쉰 나는 모든 힘을 모아 맹공을 퍼부었다. 조나단은 그게 휘청이더니 풀썩 쓰러졌다. 

 

[조나단]

으윽!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는 그림 소울로 실험실의 모든 코드를 뽑아 전원을 차단했다. 아무것도 작동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조나단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마 자신이 증폭한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한 거겠지. 그토록 원하더니, 마침내 딸의 곁으로 간 것이다.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끝났는데, 후련한 마음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지진? 아니, 동굴이 무너지려는 건가!

 

[카이로스]

거기 있니? 

 

카이로스 선배의 목소리다. 나는 실험실에서 뛰어나가다 선배와 정면으로 부딪겠다. 

 

[카이로스]

무사했구나! 

 

[나]

다 마무리되었지만... 이사장님은 돌아가셨어요 

 

 놀라는 선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순간, 동굴 벽이 그게 흔들리고 굉음이 울렸다. 바위들이 여기저기서 떨어지자, 선배는 나를 감싸고서 소리겠다. 

 

[카이로스]

어서 나가자!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달려 나갔다. 선배와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그동안에도 지진은 점점 강해졌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오자 마법진이 나타났다. 홀린 듯 마법진을 바라본 순간.

 그 한가운데서 시공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거품 우주와 환영들로 가득한 별의 바다가 필쳐져 있었다. 광활한 별의 바다 위에서, 카이로스의 나비는 아직도 날아가고 있었다.

 알로라를 소중히 등에 업고 날던 나비는 일순,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주춤했다. 또 지진...! 나비는 벽을 뚫으려는 듯 안간힘을 썼고, 그때마다 지진이 일어났다.

 두 세계의 통로가 닫히는 바람에 그 사이에 갇히고 만 것이다. 제 몸 다치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그를 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카이로스...!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가야 해. 저 문을 넘어 우주의 경계로, 그에게로 가자! 하지만 그다음엔...? 내가 할수 있지? 그에게 아직 의식이 있다 해도, 과연 내 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게다가... 별의 바다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에게 도달조차 못 할 수도 있다. 카이로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은 분명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겠지.

 

[카이로스]

정신 차려! 어서 나가야 해! 

 

 그래. 망설이는 건 이제 그만. 나는 입술을 깨물고서 선배를 올려다봤다. 

 

[카이로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선배는 어쩜 내 맘을 이리도 잘 아는지. 

 

[나]

나를 줄곧 믿어줘서 고마워요, 선배. 나. 딱 한 번만 더 믿어줄래요? 꼭 가야만 하는 곳이 있어요.

 

[카이로스]

대체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

거긴 아마도 내가 모르는 곳이겠지? 너는 항상 모험을 하는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해. 

 

선배는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카이로스]

혹시 내가 도와줄 건 없어? 편하게 말해도 돼, 신입생. 

 

그때, 문득 뭔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

아아! 선배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는 평행세계의 카이로스와 동일인이다. 선배의 흔적을 지표 삼아 카이로스를 찾을 수 있을지도! 

 

[나]

선배, 저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피를 조금 얻을 수 있을까요? 조금이면 돼요. 

 

[카이로스]

확실히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뭐, 어렵지 않지. 

 그는 동굴의 거친 표면으로 손을 뻗어 상처를 냈다. 

 선배의 상처에 맞닿은 내 손바닥에 따스한 피가 묻어났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그의 손을 한번 꼭 잡고서 놓아주었다. 천천히 문을 항해 뒷걸음쳐 가자 별빛이 내 몸을 감쌌다. 

 

[나]

고마워요, 선배! 

 

 별의 문을 지났다. 내가 갈게요, 카이로스! 조금만 기다려줘요!

내 마음은 온통 별의 바다 저편의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

 

 나는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별의 바다에 서 있다. 일렁이는 우주의 거품이 무한히 필쳐져 있는 곳. 이곳은 모든 평행세계의 경계 지대이자 별무리들의 틈이다.

 저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보였다.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암흑의 세계. 

 

[신비한 목소리]

그곳은 볼 필요 없단다. 네가 갈 곳이 아니니까. 

 

나의 놀라움을 읽었는지 신비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신비한 목소리]

거긴 별들이 소멸하는 장소야.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어떠한 우주에도 속하지 않는 곳. 시간과 공간의 개넘조차 한하지 않는... 바로, '시공의 균열'이란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으니 절대로 다가가선 안 돼. 

 

 의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돌아보니, 온 사방에서 거품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갑작스레 진동이 일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기 시작했다. 이건...? 시공의 공명 때문인가? 한 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흐름이라 몸을 가눌 수도,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여기 휘말리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안 돼...! 뭐라도 잡고 의지하고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활짝 필쳐진 내 손가락 사이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나비. 카이로스, 그가... 나를 찾아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내 세계의 카이로스는 나를 에르세르의 카이로스에게로 데려다주었다. 곧, 강하고도 부드러운 힘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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