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과거의 별

2024. 1. 3. 22:31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또 한 번 세상이 뒤집혔다.

눈앞엔 단편적인 영상들이 스쳤다.

이건...? 알카이드의 기억이다. 

 

카이로스가 셜린을 뺏어가던 날. 알카이드가 고작 열한 살이었던 그때였다. 

 

[셜린]

오빠...! 오빠, 흐흑...!

 

 동생부터 먹이고 돌보는 바람에 알카이드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빈사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죽을힘까지 짜내 카이로스를 뒤쫓았다.

 마침내 카이로스가 걸음을 멈추고 알카이드를 돌아봤다. 알카이드를 지탱하던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카이로스]

어린 녀석이 제법 분노를 잘 다스리는구나. 고통을 참는 데도 능한 것 같고. 

 

카이로스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알카이드를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카이로스]

마음에 드는군. 

 

돌연, 창백한 빛이 알카이드의 주변을 감쌌다. 기적 같은 광경이었다. 이윽고 허공에 빛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마치 반딧불 같기도, 별 같기도 했다. 그 빛들은 어디서 날아든 것이 아니다. 바로 알카이드의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카이로스]

마탑에 들일 자질은 충분하군. 마침 새 견습생을 찾고있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말에 알카이드는 몹시 당황했다. 

 

[알카이드]

하, 하지만 전에 만났던 마법사님은 제게 재능이 없다고 하던데...! 

 

[카이로스]

멍청한 소리. 마법은 기술이 아니라 욕망으로 발현시기는 것이다. 

 

카이로스는 알카이드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눈으로. 

 

[카이로스]

자아, 너의 욕망은 어떤 모습인지, 내게 보여다오. 

 

내내 느긋하던 카이로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카이로스]

믿을 수 없군. 동생을 지키는 것... 겨우 그뿐이라고? 호음. 이타적 욕망이라니, 처음 보는 유형이군. 역시 흥미로워. 따라오거라. 내 직접 너를 거두겠다. 

 

카이로스는 셜린과 알카이드를 모두 데려갔다. 그리고 그를 직속 제자로 삼았다. 어린 알카이드는 그날 카이로스가 했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대마법사에게서 인정받고 직접 마법을 전수받게 돼 그저 기쁘기만 했다. 

 

-

 

세월이 흘렀다. 알카이드는 마탑의 최상층에 위치한 연구실을 지나, 안쪽 방으로 향했다. 마탑 소속 마법사 중에서도 대마법사 카이로스의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카이로스]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구나, 알카이드. 

 

[알카이드]

감사합니다. 최종 시험에서 마법 이론과 실전을 비롯해 모든 과목에서 수석을 거머쥐었습니다. 예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카이로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너의 가치는 남과 다른 '특별함'에 있지. 

 

카이로스의 푸른 눈동자는 알카이드를 향해 있었지만,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보고 있는 듯 초점이 멀었다. 

 

[카이로스]

지금껏 내가 키워온 마법사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했다. 그러니 몸과 정신이 성숙해지면 너 역시도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지. 이타적인 욕망이라니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너는 고집을 꺾는 법이 없었지. 

 

[알카이드]

계속 지켜봐주십시오. 

 

알카이드는 당당하게 스승을 마주했다. 

 

[알카이드]

예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일순, 카이로스의 눈빛이 짙어졌다. 

 

[카이로스]

기대라... 네게 딱히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긴 세월을 살아보니 기대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더구나. 

 

카이로스의 목소리는 바람 없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쓸쓸했다. 

 

[알카이드]

앞으로 어떠한 임무라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반드시 완수해내겠습니다. 

 

[카이로스]

역겅을 자처하는구나. 좋다. 너를 믿어보마. 

 

카이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끄러미 알카이드를 바라봤다. 

 

[카이로스]

부디, 나를 실망시기지 말거라, 알카이드.

 

장소가 바뀌었다. 이번엔 설린의 방이었다. 셜린은 제국의 성녀로, 알카이드는 마탑 9성의 고위마법사로. 남매는 신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세계의 신녀를 데려오기 위한 의식을 앞뒀지만, 셜린은 의연했다. 

 

[셜린]

어서 와, 오빠. 불쑥 와달라고 해서 놀랐지? 

 

[알카이드]

무슨 일이야? 

 

[셜린]

여기, 이 서랍에 넣어놨어. 잘 기억해뒤. 오빠한테 선물하려고 만든 거야. 

 

[알카이드]

그게... 뭔데? 

 

[셜린]

별의 힘을 담은 티아라. 공간 이동의 매개체를 만들고 싶어서 오랫동안 혼자 연구해왔는데, 최근에 성공했어. 언젠가... 오빠가 새로운 삶을 간절히 바라는 날이 온다면 이걸 쓰도록 해.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을 거야. 

 

[알카이드]

왜 이런 걸... 도망치고 싶은 거야, 셜린? 

 

[셜린]

아니, 전혀. 제물로 바쳐지는 거, 난 두렵지 않아. 

 

어린 시절 그토록 울보였던 설린이었건만,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셜린]

나는 성녀야, 오빠. 나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성녀. 내가 그들이 가는 길을 열고 빛을 밝혀줘야 해. 그게 내 운명이라면. 

 

그녀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순수했다. 

 

[셜린]

나는 별이 되고 싶어. 사람들을 위해 빛나는 별. 

 

[알카이드]

셜린... 나... 모르겠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셜린]

내 걱정은 하지 마, 오빠. 그보다, 내가 오빠에게 이 티아라를 주는 이유, 궁금하지 않아? 그동안 나는 수면 거울을 통해 많은 걸 봤어. 다른 세계에서 오게 될 그녀는 누구인지, 그리고 얼음 나비가 없는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곧 오빠도 그녀를 만나게 되겠지. 그녀의 세계는 마법이나 재앙도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굉장한 곳이었어. 직접 가서 보고 싶을 정도로. 

 

[알카이드]

그딴 건 관심 없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셜린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셜린]

언젠가, 오빠는 보게 될 거야. 할 수 있어. 반드시 행복해져야 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

 

[셜린]

...안녕,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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