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시련

2024. 1. 3. 21:49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아침이 밝았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카이드겠지. 
 
[시녀]
아, 아침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마, 맛있게 드세요! 
 
알카이드가 아니라 앳된 얼굴의 시녀였다. 
 
[나]
알카이드는 어디 있나요? 
 
[시녀]
저, 전 아무것도 몰라요!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시녀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더 물어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나간 뒤, 나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조금 전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
부, 분부대로 아침식사를 가져다드렸어요.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상대는 며칠 동안 내가 줄곧 경계하던 장본인이었다. 
 
[호레스]
매정한 아이로구나. 신녀님이 잘 드시는지도 확인 했어야지. 
 
도대체 얼마나 겁을 주었기에, 어린 시녀는 벌벌 떠느라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보였다. 나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나]
나한테 볼일이 있거든 직접 얘기해요. 엉뚱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호레스의 음흉한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그는 피식 웃더니 그제야 시녀를 보내주었다. 
 
[호레스]
이 몸이 다른 아가씨에게 관심을 쏟은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군. 오해하지 말라고. 나는 계속 신녀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망상이 심하시네. 이상한 녀석과는 더 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카이드를 찾으려고 걸음을 뗐다. 호레스가 나를 막아섰다. 
 
[호레스]
귀여운 아기 고양이, 누굴 찾고 있지? 
 
비켜가려 했지만 또 한 번 가로막혔다. 녀석은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내 갈 길을 자꾸만 방해했다. 
 
[호레스]
식사 시간에 쏘다니는 버릇은 나빠요, 귀여운 신녀님.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도망치는 널 강제로 붙잡아 감금하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짜릿해지는걸.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다가왔다. 청초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다니. 
 
-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징글징글한 녀석은 끝까지 내게 따라붙었다. 
 
[나]
알카이드는 어딨죠?
 
[호레스]
그 녀석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같은 감시자라면 내 쪽이 훨씬 더 낫잖아? 재미없는 알카이드 따위, 아니, 그 녀석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생각나지 않도록 해줄 수 있어. 내게 맡겨봐. 너의 색욕은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본 적 없지? 내가 보여줄게. 아주 깊은 곳, 밑바닥까지 전부 다...
 
 내가 기겁하며 물러나자 녀석은 점점 다가들었다. 벽에 막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됐을 때, 나는 당장이라도 그림 소울을 소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내 힘을 드러내면 뒷일을 수습하기 힘들어진다. 알카이드까지 난처해질 것이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몸서리치던 순간이었다. 호레스가 허공을 날아가 뒷벽에 처박혔다! 
 
[호레스]
크윽!
 
쓰레기처럼 구겨져 바닥에 처박힌 호레스의 위로 익숙한 인영이 어렸다. 
 
[알카이드]
경고했잖습니까. 신녀님께 불손한 태도를 보이면 전력으로 대응하겠다고. 
 
[나]
알카이드...?
 
알카이드의 감정적인 모습은 처음 본다. 흡사 맹수처럼 공격적인 모습 역시 너무도 생소했다. 호레스는 한참 만에야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를 내거나 반격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씨익 웃었다. 
 
[호레스]
적당히 해. 여긴 황궁이야. 우리가 맘껏 날뛸 수 있는 마탑이 아니라고. 예하께 임무를 받은 직후, 너희를 뒷조사했어. 내가 발견했게?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알카이드를 바라봤다. 
 
[호레스]
그날, 빈민가에서 누굴 만났더군. 
 
[알카이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호레스. 
 
[호레스]
반란군을 마주치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니. 이런이런, 알카이드, 설마 그 녀석들과 내통해 우리 귀여운 신녀님을 빼돌릴 작정이였어? 
 
호레스는 심증뿐인 거다. 만약 그가 알카이드의 약점을 확실히 잡았다면, 카이로스가 직접 알카이드를 문책했을 것이다. 
 
[알카이드]
호레스. 이 중차대한 시기에 당신은 한가롭게 돌아다니며 말도 안 되는 모함이나 하고 있군요.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예하의 계획에서 신녀님이 얼마나 중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신녀님의 신변을 위협했습니다. 이 일이 만약 예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분께서 과연 용서하실까요? 오늘 일은 예하께 낱낱이 보고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 신녀님을 지킬 자격이 있는지도 확인해보죠. 
 
알카이드는 날선 목소리로 상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줄곧 느긋하기만 하던 호레스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호레스]
알카이드,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그저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뿐이야. 언제나 성실한 너를 본받아서 말이지. 오해는 우리끼리 잘 풀었으니 굳이 예하를 귀찮게 해드리지는 말자고. 그럼, 바빠서 난 이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물러나는 호레스의 팔에선 뱀이 계속 꿈들거리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어 뒷목이 섬뜩했다. 
 
-
 
둘만 남은 후, 알카이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카이드]
괜찮으십니까? 
 
나는 그에게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알카이드가 조금만 늦었어도, 내가 손을 댔을 뻔했다.
 
[나]
괜찮아요. 고마워요, 알카이드. 
 
알카이드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테이불로 다가갔다. 
 
[알카이드]
식사가 다 식었겠네요. 다시 준비해 오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등골이 오싹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
알카이드, 잠깐만요! 
 
한발 늦고 말았다. 접시의 덮개 안에서 뱀처럼 꽈리를 틀고 있던 빛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알카이드의 손가락을 쏘고 사라졌다. 
 
[알카이드]
이건...!
 
[나]
방금 뭐였어요? 독에 당한 건가요? 아아, 호레스 이 나쁜 자식이...!
 
[알카이드]
최대한 빨리... 저한테서 떨어져요..!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척 이상하고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알카이드]
안 돼!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
알카이드...? 왜 그래요? 많이 다쳤어요? 
 
알카이드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돌아보니, 어느새 호레스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
이 나쁜 자식! 알카이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빨리 해독제 내놔!
 
[호레스]
해독제라니, 무슨 섭섭한 소릴 하는 거야? 사람을 즐겁게 하는 보물이 어찌 독이겠어? 아아, 아까워라. 신녀님과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모처럼 심어둔 마법을 엉뚱한 녀석이 채가다니. 하지만 뭐, 나쁘진 않군. 의외의 전개는 극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법. 
 
그는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알카이드]
그녀는 건드리지 마...!
 
[호레스]
저런, 가없기도 하지, 위선자 알카이드.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봐, 친구. 저 여자가 울면서 너에게 매달리고 에원하길 간절히 바라잖아. 
 
알카이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아냈다. 설마... 호레스의 마법 적성은 바로 색욕...
 
[호레스]
고결한 척 할 것 없어. 친애하는 알카이드. 난 네가 뭘 원하는지 다 알아. 욕망에 순순히 몸을 맡겨봐. 미칠 듯한 쾌락을 즐겨보라고.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테니.
 
호레스는 임무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번 기회에 알카이드를 굴복시기려던 게 분명했다. 
 
[나]
알카이드! 
 
알카이드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안색은 창백하고 피부는 온통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불거진 핏줄까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알카이드]
제게서... 멀리 떨어지세요, 제발...
 
알카이드는 손을 뻗어 컵을 집어 들더니, 있는 힘껏 바닥에다 내리쳐 깨뜨렸다. 
 
[나]
알카이드, 무슨...!
 
알카이드는 망설임 없이 유리 파편을 움켜쥐었다. 피투성이인 그의 손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그를 돕기 위해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도움은 커녕, 불에다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알카이드]
놔...! 내게서 떨어지라고, 제발! 
 
그제야 알카이드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자해한 건 고통을 통해 정신을 붙들기 위해서였나 보다. 
 
[알카이드]
그대로 가만히 있어줘요. 부탁이에요...
 
 알카이드의 목소리는 그새 잔뜩 쉬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마법이기에 그 알카이드가 이럴까. 그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다. 알카이드....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호레스는 혼자서 극도로 즐거워했다. 
 
[호레스]
아아, 이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또 있으려나. 
 
매 순간이 시련의 연속이었다. 힘겨위하는 알카이드가 안쓰러워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호레스]
지긋지긋한 자식. 도대체 왜 버티는 거야? 난 말이야. 네 그런 모습이 딱 질색이었어. 슬슬 인정하고 편해지는 게 어때? 우리는 모두 짐승이라는 걸. 
 
고개를 든 알카이드의 눈동자는 초점없이 흐릿해져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
?!
 
[알카이드]
으윽... 하아...
 
알카이드의 눈빛은 갈증과 굶주림에 오랫동안 시달린 짐승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엔 끝까지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 또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알카이드는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담담한 눈빛은 일그러져 있었고,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그 손이 데어버릴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손목을 꽉 붙잡은 그의 손아귀 힘은 이따금씩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아프게 할까 봐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호레스]
고집스럽기도 하지. 미런하게 발버둥 칠 필요 없다니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호레스]
크윽? 너...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쿨럭! 
 
호레스는 내게 공격당한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역시, 꾹꾹 참고 당하기만 하는 건 적성에 안 맞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신속하게 그림 소울을 소환해냈다.

'에르세르 대륙(完) > 별들의 장 (알카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9화. 수호자  (0) 2024.01.03
8화. 맞잡은 손  (0) 2024.01.03
6화. 감시자  (0) 2024.01.03
5화. 원한의 그림자, 의심  (0) 2024.01.02
4화. 별밤  (0)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