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순찰병

2024. 1. 3. 23:47에르세르 대륙(完)/별들의 장 (알카이드)

 알카이드를 안고서 기나긴 암흑을 헤쳐나갔다. 티아라가 어느 정도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알카이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사방이 밝아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긴... 빈민가 근처?
 두 사람을 다 전송시기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우리는 에르세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당장 카이로스의 공격을 피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알카이드는 정신을 잃은 채 힘없이 내게 기대어 있었다.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서 부축하던 순간, 손끝으로 불길한 감촉이 전해졌다. 뜨겁고 축축한... 피! 동시에 저편에서 발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순찰 중인 호위병]
인기척이다! 이쪽이야!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황실 호위병 차림의 병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서 곧장 다가왔다. 

[순찰 중인 호위병]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수상한데? 반란군 잔당인가 보군! 연행해라! 

-

 나는 신속하게 호위병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곧 더 많은 병사들이 몰려왔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림 소울을 소환하려던 순간... 그 많던 병사들이 동시에 주저앉더니 단체로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렸다. 어디 다치거나 한 것 같진 않았다.
 알카이드...? 나는 알카이드를 바라봤다. 정신을 읾은 상태로도 그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불현듯 콧날이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
이런 잔혹한 세상에 어떻게 당신같은 부드러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거죠...

주변엔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카이로스가 우릴 찾고 있을 테니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없다. 일단 눈에 띄지 않도록 숨는 게 우선이겠지.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알카이드를 데리고 이동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
이쪽이야! 

[나]
누구...?

[???]
쉿, 조용히! 어서 이쪽으로 와! 

나는 사력을 다해 알카이드를 끌고 골목길 안쪽으로 향했다. 검은 인영이 불쑥 다가오더니 알카이드를 부축했다. 

[나]
아아, 당신은...!

알카이드의 옛 친구 잭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잭]
쉬잇. 조용히 따라와. 

잭은 미로 같은 골목을 깊숙이 걸어 들어가 거의 쓰러져가는 집에 들어섰다. 폐가로 위장된 이곳은 대피로까지 확보되어 있는 비밀 은신처라고 했다. 마침내 알카이드를 편히 눕힐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하고 아늑한 곳에 누운 그를 보니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나]
알카이드를 도와취서 고마워요, 잭. 근데 어째서...

[잭]
하여튼,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야. 저렇게 될 때까지 또 혼자서 다 참았겠지.

잭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잭]
뒤늦게 알았어. 알카이드와 셜린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도, 그리고 녀석들이 지금껏 전 재산을 털어 빈민들을 도왔다는 것도. 나는... 전혀 몰랐어.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돌아선 채 오해하고 원망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배신은 이 녀석이 아니라 내가 한 건지도 몰라. 그러니 이제라도 의리를 지키고 싶어. 

 지금 이 순간, 알카이드가 직접 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재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가로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알카이드를 지혈하며 잭에게 따뜻한 물과 비상약을 부탁했다. 상처를 막고 상태를 안정시켰음에도, 알카이드는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잭은 바깥으로 나가 주변을 경계했고, 나는 계속해서 알카이드를 보살폈다. 
 눈을 감은 알카이드의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그려냈다. 지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를 겹겹이 얽매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마법사 로브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상처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그 모든 과정 내내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알카이드를 믿지만, 상대가 대륙 최강의 마법사 카이로스다 보니 걱정이 컸다. 

[나]
푹 자고 난 뒤엔 가뿐하게 일어나야 해요, 알았죠?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요. 지금은 아무 걱정 말고 쉬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반드시 함께할 거예요. 그러니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주문처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사방은 고요했다. 긴장과 피로를 이기지 못한 나도 깜박 졸고 말았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알카이드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그에게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 앞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잭]
황궁에서 도주한 '남녀 한 쌍'의 수배령이 떨어졌더군. 수색 규모가 반란군 색출보다 더하던데. 혹시 질투나 뭐... 그런 건가? 도대체 얼마나 높은 분의 여자를 가로챈 거야, 이 자식은?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나]
잠깐만요, 그런 게 아니라...!

잭은 내 말을 막고서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잭]
구차하게 변명할 거 없어. 둘만 좋으면 됐지, 사랑의 도피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잠깐. 방금 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펄쩍 뛰며 반박하려던 때, 알카이드가 몸을 움찔했다. 반색하며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깨지 않았다. 그 바람에 해명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잭]
이 녀석,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지? 

잭은 물끄러미 알카이드를 바라봤다. 

[잭]
입 딱 다물고 저 혼자서 다 해결하려는, 아주 나쁜 버릇 말이야. 

[나]
네. 자긴 어떻게 되든지 전혀 상관 않고 앞에 나서는 것도. 

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잭]
세월이 흘러도 어쩐지 달라지는 건 없는 기분이군. 사람도, 이 빌어먹을 세상도...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난 셜린을 좋아했어.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고 할 생각이었지. 

잭의 목소리엔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잭]
도대체 성녀는 뭐고 또 구원은 뭔지. 그 애는 처음부터 운명에 농락당한 거야. 착하다는 죄로...

어쩌다 보니 잭과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황성 외곽 담당인데, 마탑 정찰을 위해 파견 중이라고 했다. 반란군이라... 그 주둔지에는 부상을 치료할 약이나 마법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와 알카이드는 황제와 마탑의 적이 되어 쫓기는 중이다. 능력도 있고 저쪽의 비밀도 알고 있는 우리를 반란군이 마다하진 않겠지. 어떤 내상을 입었을지 모르는 알카이드를 계속 이대로 둘 수는 없다. 결단을 내릴 시간이다. 

[나]
잭, 혹시 당신네 주둔지로 우릴 데려가줄 수 있나요?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위졌다. 병사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순찰 중인 호위병]
샅샅이 뒤져라! 여자 쪽은 반드시 생포해야만 한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낭패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지금, 붙잡힌다면 알카이드는 죽은 목숨이다. 도무지 이 상황에서 헤어나갈 방법이 없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잭은 담담히 말했다.

[잭]
좀 더 얘기 나누고 싶지만, 이젠 헤어져야 할 시간인 것 같네. 저쪽 바닥을 들어올리면 문이 하나 있을 거야. 거길 통해 지하의 비밀 통로로 내려갈 수 있어. 그 통로는 황성 외곽으로 곧장 이어지니, 뒤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 

이어서 잭은 반란군 주둔지의 위치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나]
잭은 같이 안 가는 건가요? 어떻게 하려고요? 

그는 씩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비밀 통로의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알카이드와 나를 지하로 내려보낸 그는 통로의 입구를 닫았다. 곧이어 은신처 밖으로 달려나가는 발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잭]
제국의 개들아! 이쪽이다! 

 잭의 목소리는 병사들의 발소리에 파묻혀버렸다. 나는 입을 들어막고서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잭이 만들어준 기회를 허투루 날려버려선 안 된다. 
 
-

통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알카이드를 부축해 좁은 통로 안을 더듬어 나아갔다. 


'에르세르 대륙(完) > 별들의 장 (알카이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화. 멈춘 시간  (0) 2024.01.04
12화. 도움요청  (0) 2024.01.04
10화. 과거의 별  (0) 2024.01.03
9화. 수호자  (0) 2024.01.03
8화. 맞잡은 손  (0) 202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