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신입생 등록일

2023. 12. 24. 13:17캠퍼스 편(完)

신입생 등록을 하고나니 새롭게 다가올 캠퍼스 생활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신입생 등록일. 오늘 정식으로 세인트 셀터 학원의 학생으로서 등록을 마친 뒤, 예신을 만나기로 했다. 본관은 나같은 신입생들로 인산인해였다. 제 3강당이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계단에서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안경을 쓴 차가운 이미지의 남학생이었는데, 등에다 대나무라도 꽂아둔 듯한 꼿꼿한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

저기, 실례지만...

 

내가 묻기도 전에 그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남학생]

신입생은 저쪽.

 

 어떻게 알았지? 독심술이라도 쓴 건가? 안내받은 방향으로 걸어가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그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의문의 독심술사(?) 덕에 접수처를 쉽게 찾아낸 나는 무사히 학생 등록을 마쳤다. 학생수첩과 커리큘럼 책자를 받았고, 미술학과 신입생에겐 특별히 스케치용 연필 한통을 주었다. 학과별로 축하 선물이 다른 듯 했다. 법학과는 검은 우산을 받는다는 걸 보니, 꼭 과의 특색을 살린 선물만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무용과 접수처를 지나가던 중, 나는 우연히 채린을 발견했다. 채린 역시 나를 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채린]

벌써 등록 마쳤어?

 

[나]

기숙사에서 짐을 빼야해서. 그 전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 잠깐 사이에도 정이 많이 들었는지, 채린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채린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앞으로도 자주 만나자. 나, 네 공연보러 '별들의 경연'도 꼭 갈거야.

 

[채린]

정말? 정말 날 보러 와줄 거야?

 

[나]

당연하지! 약속!

 

채린의 두 눈매는 어느새 보기 좋은 초승달 모양이 되어 있었다.

 

[???]

올해 '별들의 경연'엔 특히나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참여한다더군. 채린 학생의 멋진 무대를 기대하고 있다네. 

 

한 노신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채린]

앗... 이사장님! 

 

채린은 멍하니 서 있는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었다. 

 

[채린]

이분은 조나단(원* 손탁일) 이사장님이서. 

 

[나]

이사장님...? 아아.. 안녕하세요! 

 

재한 선배가 말했던 세인트 셀터의 창립자이자 천문학과 원로 교수인 조나단 이사장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깊은 눈매에 독특한 녹색 눈을 가진 이사장은 나의 인사를 정중하게 받아주었다. 그의 깊은 눈두덩이 속 짙은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샘처럼 보였다.

 

[조나단]

경연까지는 이를 남았군. 채린 학생이 이번 경연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걸 잘 알고 있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게. 

 

말은 채린에게 하고 있었지만, 이사장의 시선은 나에게 못 박혀 있었다. 마치 관찰당하는 듯 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채린]

신경 써주서서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그럼, 전 이만 연습하러 가볼게요. 

 

채린과 같이 자리를 뜨려던 순간, 이사장이 나를 불러세웠다. 

 

[조나단]

학생은 잠시 시간을 내주겠나? 할 말이 있네. 

 

채린은 눈짓으로 같이 있어줄까? 라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무슨 일이신가요? 

 

[조나단]

예신 선생이 데려온 학생이 바로 자네로군. 

 

아무리 예신이 이곳의 교수직을 맡은 지 오래이니 이사장이 나를 알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장의 다음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나단]

화가 EmeraId가 제 손으로 키워낸 제자이니 실력이 뛰어날 수밖에. 전액 장학생은 우리 학교의 긴 역사에서도 몇 안 된다네. 

 

내가 세인트 셀터의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내 자신이 부쩍 자랑스러웠다. 예신도 그건 내 노력의 결과니 당연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그 유명한 EmeraId가 날 키워냈다고? 설마 예신이... 몹시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이사장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조나단]

저런. 학생은 몰랐나 보군. 예신이 바로 그 신비의 화가 Emerald일세.

 

[나]

예신이... 예신이 EmeraId라니...! 그런...! 

 

나를 보살펴왔던 긴 시간 동안, 예신은 내 앞에서 단 한번도 그림을 그리지도, 그림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예신이... 내가 가장 동경하는 화가라고...?! 충격으로 말문이 막히고 귀가 먹먹해졌다. 이사장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정재한]

어이, 후배님! 여기서 또 보네!

 

어디선가 유쾌하고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난입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오는 저 유쾌한 목소리가 이토록 반갑다니. 그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저 사람은- 아까 본관에서 봤던 그 독심술...? 

 

[남학생]

방해해서 최송합니다, 이사장님. 경연 문제로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조나단]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이사장은 자상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조나단]

학생, 곤란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 EmeraId의 제자가 하는 부탁이라면 뭐든 흔쾌히 도와줄 테니. 

 

[나]

나는 억지로 웃으려 애쓰며 답했다. 실은... 예신과는 이런 에길 해본 적이 없어요. 최송하지만 오늘 이야긴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무표정하게 기다리고 서 있던 남학생은 안경렌즈 너머로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사장이 뭔가 덧붙이려는 듯 하던 순간, 남학생이 돌연 입을 열었다. 

 

[남학생]

최송하지만, 긴급한 일이라 지금 바로 가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나단]

으음... 그래? 어쩔 수 없지.

 

 재한 선배는 짓궂게 윙크를 날리고서 자리를 뜬 두 사람을 뒤따랐다. 나는 그들 중 안경 쓴 남학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날 도와준 것 같은데... 저 사람은 누구지? 학생회 소속인가? 학생회라... 문득 뭔가가 떠오른 나는 신입생 등록 때 받았던 학생 수첩을 열어보았다.

 

 정체가 궁금했던 그 사람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사진 바로 아래에 '학생회장 카이로스'라고 적혀 있었다. 아아, 학생회장이었구나, 어쩐지! 잘생긴 실물을 그대로 담은 그의 증명사진에선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 엿보였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인상이랄까. 흠, 사진보다는 실물이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재한 선배는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사칭했을까.

 아... 혹시 교직원 정보도 있으려나?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보니 학생수접의 마지막 장에 교직원 소개란이 있었고, 그곳엔 예신의 이름도 보였다. 그러나 다른 교수진과 달리 예신은 소개글도 사진도 없었다. 야속할 정도로 딱 이름 한 줄 뿐이라니. 그나저나 방금 이사장님한테서 들은 얘기... 본인이 직접 이야기 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예신에게 꼭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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