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운명의 윤회

2024. 3. 1. 21:30에르세르 대륙(完)/전승의 장 (카이로스)

※열람 전,에르세르의 모든 스토리를 읽고오시는 걸 반드시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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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이 에르세르 대륙에서의 몇 번째 여정인지 모르겠다. 결말을 바꾸고자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그러나 알카이드는 나를 구하기 위해 번번히 내 세계를 망가뜨렸고, 에르세르는 매번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결말만 되풀이될 뿐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에르세르에 대한 정보도 절실했다. 두 세계를 모두 지키고 싶었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

 

나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운명 앞에서 나는 여전히 한낱 미물인 존재였다. 


 대마법사 카이로스에 의해 번번이 거대한 새장에 갇혔으며, 결국 제물이 되어 마법진 안에서 목숨을 잃은 적이 부지기수. 그를 피해 황성에서 도망친다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설원에서 혼자 얼음 나비를 상대하다 체력 고갈로 쓰러져야만 했다. 반란군 주둔지에 가보면 혹시 다를까 싶었다. 하지만 정보는커녕, 오히려 첩자로 오인받았다. 저항군의 화살이 나를 꿰뚫고 수많은 칼이 나를 덮쳤다. 마법사에게 접근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비열하고도 끔찍한 술수에 버텨내질 못했던 것이다. 

 그간 얻은 거라곤 나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뿐이었다. 에르세르에서의 생명이 다하면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느덧 그림 소울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를 수 있게 되었다.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은 곳에 갈 수 있었으며, 좀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다양한 인물들이 이 혼돈의 세상 안에서 저마다 다른 목적을 좇고 있었다. 나는 강림 의식과 관련이 있거나 실비나이트에 대적하는 중심인물들을 대상으로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다.

 그중 최선의 결과는 강림 의식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내가 제물이 되는 일 없이.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자 희생한 이들을 구할 길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강림 마법을 통해 나와 에르세르인들은 또다시 여정의 끝에 도달했다. 녹음이 우거진 숲, 지저귀는 새소리와 매혹적인 꽃향기. 이것이 한계일까. 현실과 만화는 다르고, 나 또한 완벽한 결말을 써낼 수 있는 뛰어난 작가가 아니니까.

 

그만둘까, 이런 짓...

너무 피곤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것들은 내버려두자.

길고 험난했던 여정은 여기서 마치고,

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별의 바다를 건너 저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내가 알던 나의 세계, 내 집이 아니었다. 

 눈앞에는 끔찍한 아수라장이 필쳐져 있었다. 모든 것들이 암흑으로 빨려들어갔다. 대지가 갈라지고 건물들은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사라져갔다. 

 

[나]

아, 안돼...! 이게 무슨...

 

 세상의 종말이 펼쳐지는 가운데, 별안간 조나단 이사장이 나타났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떻게 된 거야!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졌고, 나는 끝도 없는 어둠으로 추락했다. 

 그러고 보니...그동안 놓쳤던 게 하나 있었다. 채린과 설린의 희생으로 내가 에르세르에 소환된 것은 별의 경연 날. 그리고 그 행사는 비정상적으로 앞당겨 치러졌있지. 나와 채린, 그리고 에르세르를 아는 내 세계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우릴 마법진으로 유인한 거라면? 

 이쪽과 저쪽을 잇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 세계의 재앙을 막을 답은 에르세르에 있을 터.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니다. 

 

 에르세르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그들의 세계도, 내 세계도 지켜내아만 한다. 

 

 나는 다시 별의 바다로 돌아왔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과 문이 존재하는 이곳. 이곳에서 여러 세계가 교차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시공을 넘나들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문 너머로는 각각 다른 세계들이 필쳐져 있고, 거기서 생겨난 다양한 인과는 여기로 모인다. 저 중 어떤 길은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지의 세상과 이어져있다. 또 어떤 길은 시간으로 엮여, 과거와 미래를 잇고 있다. 이 문을 넘으면 나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지난 여정들을 돌이켜 보았다. 분명 내가 놓친 것이 있을 거야. 아마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곳에...

 

아... 그래! 지금껏 내가 단 한 번도

발을 디디지 않았던 곳. 바로...

 

마탑이다.

 

 마법사들의 본거지인 마탑은 에르세르에서 가장 비밀스럽고도 중요한 장소다. 그 중요한 곳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못 했던 까닭은, 아마도 카이로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탑의 주인이며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자 에르세르 대륙 최강의 마법사인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통상적인 마법과는 다른 힘을 가진 나를 매우 경계했다. 게다가 그는 강림 의식에 변수가 생기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 매번 내 신병을 구속하고 통제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하면 접근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눈앞의 풍경이 조금씩 변해갔다. 무언가 이전과는 달랐다. 

 

-

 

 잠깐, 여긴...? 학교 강당이잖아?

 빈 무대 앞에서 카메라맨이 장비를 세팅하고 있고, 그 옆에선 카이로스 선배가 방송국 피디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 중이었다. 

 

[피디]

이른 아침부터 불러내서 미안하군. 자네 덕분에 작업이 순조로웠어. 아무리 학생회장이라지만 현장을 이렇게나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니, 조금 놀랐네. 

 

[카이로스]

경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준비를 잘해뒤아지요. 

 

[피디]

그건 그렇지. 아직 아침도 못 먹었지? 여긴 우리가 마무리할 테니 자네는 어서 가봐. 

 

[카이로스]

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연락 주세요. 

 

돌아서던 선배와 시선이 딱 마주셨다. 

 

[카이로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여긴 웬일이야? 

 

[나]

아, 그, 그게...

 

 뭔가 잘못됐다. 왜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왔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건 이쪽의 카이로스가 아니었는데. 

 

[카이로스]

여긴 촬영 준비로 바쁘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자. 

 

선배는 나를 데리고 강당 밖으로 나갔다. 

 

[카이로스]

'별들의 경연' 카메라 세팅을 돕고 있었어. 완벽하게 진행하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하니까. 

 

 현실 세계의 카이로스 선배는 성실하면서도 빈틈없이 철저한 성격이다. 그런 면은 대마법사 카이로스와 비슷하게 느껴지 기도 했다. 그러나 닮은 것은 딱 그것뿐,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언뜻 차가워보이긴 해도 선배는 냉혹함이나 어둠과는 거리가 먼,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다. 그는 이해심이 깊으며, 보이지 않게 타인을 돕는다. 

 그러나 저쪽의 카이로스는 언제나 어둠에 잠겨 있고, 눈 쌓인 거리처럼 차갑고 삭막했으며, 견고한 성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언제나 무표정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속을 내비치지 않았다. 카이로스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새장에 갇힌 채 얌전히 강림 마법진의 제물이 되었던 몇 번의 여정 이후로 나는 그가 두려웠다. 그래서 무조건 황궁에서, 카이로스의 새장을 피해 멀리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이런 그를 상대하며, 어떻게 마탑까지 파고들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던 중, 문득 한 가지 의심이 떠올랐다. 에르세르와 현실 세계의 동명 인물은 모두 성격이 거의 흡사했다. 그런데 왜 유독 카이로스만 정반대지? 혹시... 대마법사 카이로스의 본모습은 겉보기와 다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나]

만약에 선배가 갑자기 어둡고 냉혹한 성격으로 변한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던져놓고 보니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비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괜한 소리로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나는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나]

아, 아니에요.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미안해요. 

 

[카이로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서 조금 당황했네. 괜찮아. 타고난 성격이 부정적인 쪽으로 그게 변했다는 건, 극심한 고통을 겪었거나 감내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어둡고 냉혹한 성격이라... 남모르게 뭔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변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대상이 내게 있어 아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하겠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아주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 정말 그럴까? 감정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대마법사 카이로스가 과연...?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들어두길 잘했다. 에르세르의 카이로스를 조사할 때 분명 참고가 될 것이다. 

 

[나]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선배! 

 

선배는 희미하게 웃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카이로스]

경연 전에 점검해둘 게 많아서, 먼저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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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경연'.

 

 '별들의 경연'은 내 시공 여행의 출발지다. 채린은 바로 이 무대에서 소환 마법진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가만...! 대회가 아직 시작 전이라면... 어쩌면 이 불행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채린이 무대에 오르는 걸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나는 강당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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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분장실로 향했다. 채린이에게 경연은 아주 큰 목표였다. 그런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니 기권하라고 말해봤자 통할 리가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만들어 무대에 오르고 싶어도 오르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공연 의상이 딱이다. 이번 무대를 위해 맞춤 제작한 채린이의 흰색 의상. 그것이 없어지면 자연스레 해결되겠지. 분장실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채린의 의상을 찾기 위해 행거를 뒤지던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

어어...? 정말이네? 수상한 사람이 있어! 

 

 경연 참가자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들어와 이상한 소릴 했다. 내가 입을 뗄 틈도 없이 그녀는 밖에다 마구 외졌다. 

 

[여학생]

여기! 이쪽이에요! 

 

 남학생 두 명이 곧장 분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 역시 내 사정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은 채 범죄자라도 연행하는 것처럼 나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뭔가 이상하다. 혹시 누군가가 내 행동을 예상하고서 사람들을 보낸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한참이나 실랑이하며 질질 끌려나온 나는 온몸으로 저항했다. 

 

[나]

오해예요!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남학생 1]

경연 참가자도 아닌 사람이 분장실을 뒤지고 있었던 걸로도 충분히 수상해! 이사장님께서 경연을 망치려는 사람이 있다며 잘 순찰하라고 하셨는데, 설마 진짜였을 줄이아. 

 

[남학생 2]

따라와! 이사장님께 보고한 뒤 경찰에 넘기겠어! 

 

 안 돼! 곧 채린이가 무대에 오른다고! 어떡하지...?

 나는 이제 그림 소울을 능숙하게 소환할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는 학교 강당이다. 보는 사람도 많은 데다, 아무리 급하대도 평범한 학생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카이로스 선배가 나타났다. 

 

[나]

선배!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카이로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이로스]

무슨 일이지?

 

[나]

이럴 때가 아니에요! 채린이가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요!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요! 

 

 아아... 틀렸다. 이런 말을 대체 누가 믿어주겠는가. 아무도 못 믿을,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선배를 바라봤다.

 그런데... 선배가 액션 영화 주인공처럼 민첩하게 주먹을 날렸다. 양쪽에서 나를 붙잡고 있던 남학생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남학생 1]

으윽! 카이로스, 무슨 짓이야...! 

 

[카이로스]

경연이 시작됐어! 어서 가!

 

 고맙다는 인사도 잊은 채, 나는 죽을힘을 다해 무대로 달려갔다. 큰 박수와 함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순간, 강당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춘 곳에 채린이가 서 있었다. 채린이는 제 운명은 전혀 모른 채 우아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안돼, 제발...!

 

그 순간,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관객석을 헤치고 무대로 돌진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내가 채린이의 옆에 도착했을 때, 채린이는 이미 눈을 감은채로 번쩍이는 마법진 위에 쓰러져있었다 . 눈에 익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또다시 반복이라니...채린이도, 나의 세계도, 에르세르도 모두 구할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아니야. 포기할 순 없지

 카이로스 선배가 인파를 헤치고 무대로 다가왔다. 그는 다소 놀란 얼굴이었지만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

날 믿고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선배! 나,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다시 해볼게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선배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다짐하고 싶었다. 

 

[나]

모두가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만들게요! 

 

 나는 카이로스 선배를 바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빛이 내 주변을 감싸더니 시공의 통로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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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우주를 유영하던 중, 나는 '성녀 설린'의 영혼과 다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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